[흥]화려한 휴가 '택시기사' 역 박철민씨

2007. 8. 16.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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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네 번을 봤고 볼 때마다 울었다"-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본 관객들에게 가장 인상에 남는 연기자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안성기, 김상경, 이요원, 이준기만을 떠올리지는 않을 것이다. 택시기사 '인봉이' 역의 박철민을 꼽는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록키'의 실베스타 스탤론 흉내를 내며 "슷슷슷 이건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녀. 팔에서 나는 소리여" 같은 그의 애드리브 "니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그 여자제. 그럴 적마다 가슴이 벌렁벌렁함서 무담시 기분이 좋아지고 맥없이 시상이 아름다워 보이제" 같은 걸쭉한 사투리 연기가 없었다면 '5월 광주'라는 무게에 관객들이 짓눌렸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주말마다 영화관을 찾아 무대인사를 하고 있는 제작팀 중에 그가 주연배우들보다 더 많은 박수갈채를 받고 있다.

게다가 박철민은 광주와 인연이 깊다. 그는 1980년 5월 광주에서 살고 있었고,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다. 데뷔 영화가 광주항쟁을 다룬 '부활의 노래'(90년)였고, 역시 5·18을 소재로 한 영화 '꽃잎'(96년)에도 출연했다. 이번 영화가 남다르겠다고 물었더니 "나도 이 영화를 네번 봤고, 볼 때마다 울었다"고 했다.

"시나리오를 볼 때부터 울었다. 펑펑 울었더니 애들이 아빠 왜 그러냐고 하더라고요. 영화 편집작업을 할 때는 아예 대성통곡을 했죠. 무대인사를 갈 때 종영 10분 전에 들어가서 영화를 보고 있으면 또 눈물이 나요. 저만 그런 게 아니라 스태프들도 마찬가지예요. 인터넷엔 '미치도록 울었다' '너무 많이 울어 뇌가 흔들리고 머리가 깨진다' 이런 리플도 많아요."

그는 "부산, 대구 사람들도 많이 운다"고 꼬리를 붙였다. 하지만 영화 얘기를 하면서도 목소리가 가끔 흔들렸고, 눈 가장자리가 붉어졌다. 분명 그 해 5월 '사연'이 있었을 것이다.

"사실 당시의 기억은 단편적이에요. 학교 안 가서 좋았고, 도청앞 상무관 앞에서 관을 부여잡고 통곡하는 사람들은 무서웠죠. 스크럼을 짜고 대학생들이 나가는 것, 계엄군 탱크가 진입한 것도 봤습니다. 시민군들이 노래부르던 모습도 생각나고…."

가족 중 다친 사람은 없느냐고 캐물었더니 그제야 "그날 아버지가 피투성이가 돼 돌아오셨다. 얼굴 한쪽이 붓고 터져서 반쪽만 알아볼 수 있었다. 광주일고 선생님이었는데 아이들이 (금남로에) 나가니까 애들 걱정하며 따라 나섰다가 계엄군에게 곤봉으로 맞았다. 파출소에서 교원증을 보여주고 겨우 풀려났다"고 털어놨다. 그의 아버지는 5·18 부상자로 등록돼 있다.

중앙대 경영학과 85학번. 단과대학 학생회장도 했고, 노동극단 '현장'에도 있었다. "그렇게 5~6년 돌다 보니 정극을 해야겠다 싶어 연극판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90년 이후 40여편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대개 5~6신의 단역이었다. 오죽했으면 어느 영화잡지에선 '얼굴을 찬찬히 훑고 나서야 아~하고 무릎을 치게 되는 배우'라고 썼다. 하지만 '화려한 휴가'만은 달랐다. '인봉'은 그를 위해 만들어진 배역이었고, 주연 못지않게 비중이 컸다.

"시나리오 작업 때부터 후배인 김지훈 감독이 저를 출연시키겠다고 맘먹고 있었죠. 제가 출연했던 30여편의 연극을 모두 봤던 감독이라 저를 잘 압니다. 그래선지 제겐 대사에 없던 애드리브도 해보라고 하고, 아예 맡겼죠. 저도 광주에서 자라서 당시 상황을 조금 경험했으니 이렇게, 저렇게 좀 하자고 하고…."

배역에 대한 비중은 컸지만 이 영화만큼 부담감이 컸던 영화가 없었다고 한다. 자신뿐이 아니라 제작진 전체가 엄청난 부담감이 있었다고 한다. 광주항쟁은 그동안 TV로, 다큐로, 책으로 수없이 접근했고, 현장을 경험한 광주 사람들도 많기 때문이다.

"광주 시사회가 끝나고 난 뒤 5·18 관련 인사들로부터 고맙다, 잘했다는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한숨을 쉬었어요. 숙제 검사가 끝난 기분이었죠. 만약 광주에서 말도 안된다고 했으면 광주를 팔아먹은 놈이 되는 거죠."

그는 "정치적인 의도가 없었고, 일부러 먹물을 빼고 만들었다. 한데 이 영화를 본 학생들이 5·18을 인터넷으로 검색한다"면서 "그래서 역설적으로 정치적인 영화라는 말까지 듣는다"고 했다. 또 "처음엔 시나리오가 윤상원 열사의 전기 같이 나왔는데 위인전 같아서 모두 바꿨다"고 했다. 5월 항쟁의 주인공은 한 명의 지식인이 아니라 그가 연기했던 택시 운전사, 대학생, 농민 같은 평범한 시민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요원은 당시 전옥주씨를 연상시키지만 여러 사람의 캐릭터가 섞인 것이고, 인봉이도 당시 택시기사 등 여러 인물이 섞인 캐릭터"라고 설명했다.

그나저나 사투리 연기가 일품이다. 아무리 전라도 토박이라고 해도 그냥 토해 낸 대사가 아니다. 이를테면 "남의 영업용 택시에 똥칠을 해놓고 택시비만 주는 건 경솔하제" "분노를 발생하는 새키, 폭력을 유발하네" "안주가 건방지네" 같은 애드리브와 대사는 해학적으로 한번 더 꼬아낸 것임이 분명하다.

"태백산맥을 세번 정도 읽으면서 전라도 사투리를 노트에 수십장 적어놓았어요. 그게 제 교과서예요. 이 걸 가지고 적절하게 연기에 응용한 거죠."

인터뷰를 마칠 무렵 그는 불쑥 묻지도 않는 말을 꺼냈다. "계엄군이 도청으로 밀려들어오기 전에 택시기사 인봉이가 자식놈 한 번 안아보고 나서, 죽을지 뻔히 알면서도 도청으로 가는 장면을 보셨죠. 저는 그게 '5·18정신'이라고 생각해요."

"이데올로기 영화가 아니라 잘 만든 상업영화"라고 강조했던 그의 눈에 다시금 물기가 비쳤다. "관람객 스코어를 지켜보는 요즘 심정이 꼭 5월 그날 같아요. 첫날 조금 들더니 주말에는 예상보다 조금 떨어지고, 그 다음 월요일엔 손님이 더 들고…. 한치 앞을 내다볼 수가 없어요. 할리우드 대작들과 경쟁해서 이 정도인 것은 그만큼 영화가 좋기 때문입니다. 관객 600만~700만명이 문제가 아니라 사실 더 많은 사람들이 봐야 하는 영환데…."

〈글 최병준·사진 이상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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