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 민주항쟁 20돌] 오충일 목사의 '그날' 회고 (1)

2007. 6. 6.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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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본<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출범 장소 2시간전 향린교회로 결정″

독재정권 그늘이 사회 전체를 뒤덮고 있던 1980년대. 민주주의를 꿈꾸는 이들 모두 숨죽이고 어두운 골목을 헤매야 했다. 갈 곳이 없었다. 매주 예배를 드리고 교인들이 수시로 모이는 교회 문만은 열려있었다. 사회 참여를 하나님의 부르심과 시대정신으로 여긴 목회자들과 교인들은 이들에게 교회를 내주고 민주화운동에 동참했다. 교회가 민주화운동의 거점이 된 것이다.

1987년 대통령직선제를 요구하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 발대식이 열린 곳도,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조작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의 시작도 교회였다. 국본 사무실도 기독교회관에 있었다. 6·10 민주항쟁 20주년을 맞아 본지는 지난 1일 오충일 목사와 당시 운동의 거점이 됐던 서울 을지로 향린교회, 정동 성공회대성당, 연지동 기독교회관 등을 순례했다.

40년전 콘크리트와 붉은 벽돌로 지은 4층건물 향린교회는 서울 을지로 고층빌딩들 뒤로 낮게 서있었다. 문 왼쪽 기둥에는 6·10항쟁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발대식 장소였음을 알리는 동판이 보였다. 입구에서 조헌정 향린교회 목사가 오충일 목사를 맞았다. 오 목사는 3층 예배당으로 향하는 계단을 지그시 밟으며 한숨 지었다.

"그날 계단을 오를 때는 '여기서 우리가 사느냐, 죽느냐'를 생각했지."

1987년 5월27일 오전 8시 국본 준비대회. 이 메모는 전국 민주화운동 단체에 한두달전부터 일찌감치 퍼졌다. 하지만 당일 오전 5시까지도 장소는 미정이었다. 보안 때문이었다. 당국이 사전파악하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수 있었다. 긴급조치 9호 위반 등으로 세차례 구속당했던 오 목사를 미행하던 정보요원만 3명이었다. 발대식 장소로 9군데를 염두에 둔 그는 전날 예비검속을 피해 종로2가 YMCA호텔 607호에 묵었다.

당일 새벽 각 장소에 미리 간 사람들이 하나둘 전갈을 보내왔다. 성공회성당에는 전날 기도회 때문에 봉고차량 한대가 있었고 명동성당에는 경찰력 50여명이 대기중이었다. 향린교회는 아무도 없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향린교회로 집결하라는 전령을 보냈다. 발대식 30분전, 향린교회 문은 굳게 닫혀있었고 주변은 고요했다.

"교회 빌려달라고 직접 말을 못했어. 그냥 사람이 많으면 집회하는 줄 알라고 했지. 안그러면 목사들이 붙들려가니까. 우리가 아무데나 쳐들어간 걸로 하는 거였지."

오 목사는 당시 담임목사 홍근수에게 급히 연락해 교회 문을 열었다. 제일 먼저 도착한 사람은 민중신학자 안병무 박사였다. 뒤이어 김찬국 연세대 신학대학원장이 당도했다. 오 목사는 "본래 국본 준비식을 열려고 했는데 숨막히는 감시 속에 다시 모이기 어려울 것 같았다"며 예배당을 천천히 둘러봤다. 정해진 시간 3층 예배당에 200여명이 모였고 발대식이 시작됐다.

구속됐던 민통련 의장 문익환 목사를 대신해 부의장 계훈제 선생이 사회를 봤다. 서울 명동성당 5·18 추모미사에서 박종철 고문사건 진상을 폭로했던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대표 김승훈 사제가 '민주헌법 쟁취하여 민주정부 수립하자'는 선언문을 낭독했다. 함석헌·김대중·김영삼 등 8명을 고문단으로 추대하고 박형규 목사와 이우정 박사·김승훈 사제 등 11명을 상임대표로 뽑았다.

오 목사는 32명 상임집행위원 중 집행위원장으로 지명됐다. 그는 "명실공히 민주화운동을 주도해온 기독교계에서 상임집행위원장을 세우고 별로 똑똑하지 않지만 발빠른 사람을 실무자로 앉히려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며 웃었다. 발대식 후 상임집행위원들은 곧바로 6월10일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조작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 준비에 착수했다.

교회는 독재정권 시절 민주화 운동 거점

독재정권 시절에는 언론·집회·결사의 자유가 거의 없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 긴급조치는 반정부집회를 모의만 해도 무기징역에 처할 수 있었다. 전두환 정권은 시국에 관한 문건에 대해 국가보안법으로 모조리 단죄했다.

교회는 거의 유일하게 합법적인 집회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당국의 감시를 피해 매주 예배를 드리고 주보를 발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의식있는 목회자들은 교회연합기구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조직을 통해 민주화운동의 적극 가담했다. 민주화운동세력이 교회로 집결한 배경이다.

서울 오장동 제일교회, 종로6가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정동 성공회대성당, 연지동 연동교회, 당산동 성문밖교회, 도렴동 종교교회, 신문로 새문안교회 등이 대표적인 교회다. 이중 제일교회와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성공회는 KNCC 실행위원회나 인권위원회에 활동하는 목회자들이 담임을 맡고있었다.

KNCC 회장 김지길 목사가 담임하고 있던 아현교회에서는 1987년 5월12일 나라 위한 철야기도회를 열었다. 참가자들은 일체의 개헌논의를 금지하는 4·13 호헌조치 발표에 분노한 목회자와 성도 1500여명이었다. 이 기도회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발대식을 준비하는 기도회가 됐다.

6월10일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 후 6·29선언이 나올 때까지 서울 시내에서는 거의 매일 대규모 집회가 이어졌다. 이때 경찰에 쫓긴 시위대가 피하는 곳도 대부분 교회였다.

"우리가 경찰에 쫓기면 가는 곳은 매번 같았다. 명동성당, 성공회대성당, 아현교회였다." 6·10항쟁에 참여했던 대학생 회사원 시민들의 회고는 일치했다.

오 목사는

연세대 신학대를 졸업한 오충일(67) 목사는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장 겸 사무처장으로 민주항쟁 시기를 보냈다. 1974년부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실행위원으로 활동했고 1982년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이사장을 지냈다. 1993년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총회장, 1994년 KNCC 회장을 맡았다. 2004년이래 현재까지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 중이다.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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