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운의 현주엽 '한국판 바클리?'

2007. 4. 15.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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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안 이상학 객원기자]지난해 11월, 창원 LG는 프로농구단 최초로 소속선수들의 이야기를 만화로 제작했다. 그 첫 주자는 바로 '매직히포' 현주엽(32·195cm). 현주엽의 농구인생을 다룬 이 만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역시 "지는 게 너무 싫다"는 현주엽의 심경이었다.

◇ 데일리안 스포츠 ⓒ 사진=NEWSIS

실제로 현주엽은 '우승복'이 지지리도 없었다. 전희철·김병철·신기성·양희승 등 화려한 멤버들과 함께한 고려대 시절에는 유독 농구대잔치와 인연이 없었고, 프로 진출 후에는 한 차례의 6강 플레이오프 진출이 고작이었다.

현주엽은 LG를 정규리그 2위에 올려놓은 올 시즌에야말로 우승을 차지할 적기를 맞은 것으로 보였지만, LG는 4강 플레이오프(5전3선승제)에서 부산 KTF에 1승3패로 퇴패, 현주엽의 꿈도 물거품 되고 말았다.

▲ 한국판 바클리

휘문고 시절, 현주엽은 당대 최고의 고교농구선수였다. 1993년 겨울, 현주엽의 고려대 진학 결정이 스포츠신문 1면에 대서특필될 정도로 집중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현주엽은 고교 시절부터 육중한 몸집을 앞세운 파워 넘치는 골밑 플레이로 일찌감치 차세대 슈퍼스타 대접을 받았고, '한국판 찰스 바클리'라는 애칭도 얻었다.

바클리는 NBA를 대표하는 당대 최고의 파워포워드였다. 198cm라는 작은 신장에도 특유의 힘으로 승부했던 바클리는 현주엽이 국내에서 막 뜨기 시작할 즈음에만 하더라도 NBA 우승을 꿈꾸고 있었고, 언젠가 우승을 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10여년의 세월이 훌쩍 지난 지금, 바클리는 끝내 우승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TNT에서 NBA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최고의 선수였지만 이제 바클리는 비운의 스타 혹은 무관의 제왕을 얘기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선수로 남고 말았다.

현주엽은 '한국판 바클리'라는 수식어를 더 이상 달가워하지 않는다. 바클리가 싫어서가 아니다. 바클리가 우승반지를 끼고 있었다면 현주엽은 '한국판 바클리'라는 수식어를 더없이 좋아했겠지만, 애석하게도 바클리는 우승반지 없이 은퇴했다. 현주엽으로서는 자칫 바클리처럼 우승하지 못하고 은퇴하게 될까봐 걱정이다. 더 이상 현주엽은 바클리가 되고 싶지 않다.

▲ 적기를 놓치다

현주엽에게 올 시즌은 프로에서 첫 우승을 달성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신산' 신선우 감독의 팀으로 재구성된 LG는 개막 5연승을 내달리는 등 개막 한 달 동안 단독선두 자리에서 내려올 줄을 몰랐다. 과거 코트를 지배했던 현주엽은 예의 위력만큼은 아니더라도 효과적으로 골밑을 공략하고 팀 밸런스를 잡아주는 핵심 멤버로 쏠쏠한 활약을 펼쳤다. LG는 정규리그 막판 가파른 상승세를 타며 4강 직행 티켓이 주어지는 2위 자리를 따내며 우승에 대한 기대를 높였다.

그러나 6강 플레이오프에서 안양 KT&G를 2승으로 일축한 KTF의 기세가 대단했다. LG는 홈에서 열린 1·2차전에서 다 잡은 경기를 연이어 역전패하며 충격의 2연패를 당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사건은 LG가 117-100으로 완승한 3차전에서 터졌다. 외국인센터 퍼비스 파스코가 폭력사태를 일으키며 구단으로부터 퇴단되고 KBL에서도 제명된 것. 이날 승리는 현주엽의 프로 데뷔 첫 플레이오프 승리였지만 현주엽은 웃을 수 없었다. 사실상 우승이 물 건너갔기 때문이었다.

과거 바클리는 운이 너무 없었다. 피닉스 선즈 시절에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1993년 NBA 파이널에서 마이클 조던의 벽에 가로막혔고, 하킴 올라주원-클라이드 드렉슬러 등과 호흡을 맞춘 휴스턴 로케츠에서는 존 스탁턴-칼 말론 콤비의 유타 재즈에 의해 우승 길이 가로막혔다. 동료복도 많았고 상복도 많았지만, 우승복만 없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한국의 바클리라던 현주엽은 프로진출 후 동료복도, 상복도 없었다. 자연히 우승복도 없었다. 비교적 동료복이 따랐던 올 시즌이 우승의 적기였지만 예기치 못한 불운은 또 다시 현주엽을 덮쳤다.

▲ 시간이 없다

◇ 데일리안 스포츠 ⓒ 사진=NEWSIS

현주엽은 올 시즌을 앞두고 보다 적극적인 공격에 나설 것이라고 공언했다. 지난 시즌 지나칠 정도로 이타적인 플레이를 펼치는 바람에 전체적인 팀 밸런스를 깨뜨렸다는 지적 때문. 또 외국인선수가 출전 제한 쿼터가 늘어난 것도 여전히 만만찮은 파워를 과시하는 현주엽에게 호재였다. 그러나 현주엽은 올 시즌 데뷔 후 처음으로 한 자릿수 득점대(평균 9.3점)에 그쳤다. 야투 시도도 데뷔 후 가장 적은 평균 7.34개가 전부였다. 공격적으로 나서겠다고 공언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던 것.

사실 과거 현주엽은 득점에 욕심을 많이 내던 선수였다. 단순히 힘만 넘치는 게 아니라 센스도 좋아 득점감각이 넘쳤다. 데뷔 첫 두 시즌 동안 평균 20점대 득점을 올릴 정도로 득점력이 뛰어났다.

그러나 현주엽은 상무 입대와 무릎 수술을 계기로 플레이 스타일에 변화를 줬다. 현주엽이 상무에 입대했을 때, 이미 그의 무릎 연골은 심하게 닳아있었다. 당시 상무 사령탑이던 추일승 KTF 감독은 현주엽에 팀플레이의 중요성을 설파, 현주엽이 변신할 수 있게끔 도왔다. 2004-05시즌 현주엽은 추 감독과 함께 KTF의 돌풍을 일으켰고, 현주엽은 '포인트 포워드'라는 수식어를 새로 얻었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 현주엽의 위치는 점점 모호해지고 있는 게 사실. 무릎 수술로 인해 현주엽은 더 이상 과거처럼 화려한 테크닉을 펼칠 수 없으며 슛 감각도 많이 무뎌졌다. 특유의 감각적인 농구센스로 팀에 공헌하고 있지만, 대폭 줄어든 출장시간(평균 26.7분)에서 나타나듯 팀에서 비중이 점점 적어지고 있다.

여기에 신선우 감독과도 코드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따르고 있다. 올라운드 플레이와 세트오펜스에 강한 현주엽과 확실한 역할분담과 빠른 공수전환을 추구하는 신선우 감독이 상극이라는 것. 실제로 현주엽의 출장시간이 대폭 줄어든 것에서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현주엽은 이제 우리나이 33살의 엄연한 노장대열에 들어섰다. 무릎 수술 후유증을 겪고 있는 현주엽이 그나마 파워와 테크닉을 발휘할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얘기. 그렇기에 올해 절호의 우승 기회를 놓친 것이 LG에게나 현주엽에게나 아쉬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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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안 스포츠/ 이상학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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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안 스포츠 편집 김태훈 기자 [ktwsc28@dailian.co.kr] 객원기자&넷포터를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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