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호진 "디지털 세상 살아가는 아날로그 세대 이야기"

2007. 2. 25.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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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좋지 아니한가' 아버지 창수 역

(서울=연합뉴스) 김가희 기자 = 그가 인터뷰에 나선 건 참 뜻밖이었다. 영화배우로서 어느새 꼭 필요한 존재가 됐음에도 그는 인터뷰를 꺼렸다. 그저 작품으로 관객과 만나면 된다는 뜻이었을 터.

그런 그가 모처럼 영화 홍보를 위해 기자들을 만나고 있다. "이렇게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라는 게 간략한 설명이다. 중견배우 천호진이 그 주인공.

천호진이 이처럼 본인 스스로 낯설어하는 상황을 받아들인 건 영화 '좋지 아니한가' 때문이다. '말아톤'의 정윤철 감독의 차기작 '좋지 아니한가'는 22억 원이라는, 한국영화계에서 비교적 적은 제작비로 만들어진 영화다. 영화로서 성과를 내고자 하는 정 감독의 의중이 깊이 담긴 이 영화는 여느 한국 영화와는 다른 어법으로 만들어졌다. 여기서 천호진은 일명 '콩가루 집안'인 심씨 가족의 아버지 창수 역을 맡았다.

창수는 밥상에서도 아내에게 한 켠으로 밀려나있으며, 심인성 발기불능으로 아내에게 면박당하기 일쑤다. 영어 교사인 그는 인터넷 강의와 똑같다는 학생들의 핀잔에 아무 말 못하고, 수업시간에 딴 짓하는 학생에게 손을 들었다 이 장면을 촬영하려고 반 학생들이 일제히 꺼내드는 휴대전화에 맥없이 손을 내리고 만다. 그러다 뜻밖의 사건에 휘말리는 전형적인 소시민.

"아날로그 가치관으로 디지털 세상에 살고 있는 딱 사오정 세대 아닐까요. 한창 꽃피울 나이인 40~50대가 이 사회가 다양하지 못해 한 켠으로 밀려나있는 모습 말이죠. 저는 다행히 젊은 감독들이 찾아주는 덕택에 지금껏 연기를 하고 있지만, 저 역시 경력이 미천한데도 벌써 기댈 데가 없습니다."

그는 우리 사회가 너무 빠르게 진화하고 있는 것을 경계했다.

"책을 읽으면서 상상력을 키우게 되죠. 그런데 떠도는 사진이나 영상의 정지된 한 장면으로 모든 것을 규정짓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영화에 큰 의미를 둔다. 인터뷰를 나설 정도로.

"이 영화는 관객마다 받아들이는 게, 해석하는 게 다를 수 있는 '행간'이 있어요. 문학 작품이든, 영화든 보는 이의 몫이죠. '관객의 몫이다'라고 말하는 걸 배우로서 책임감이 없다고도 말하는 사람이 있던데, 관객의 몫, 맞습니다. '좋지 아니한가'는 서로 다른 해석과 느낌이 존재할 수 있는 영화입니다."

평생을 함께 한 아내와도, 친아들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는 아들과도, 창수가 엮인 사건으로 인해 가장 크게 심리적 타격을 받을 딸과도 속을 열어 대화하지 않는다. 그저 같은 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서있을 뿐.

천호진은 창수 역을 통해 또 다른 면모를 선보였다. 강한 이미지로 분명하고 치밀한 연기를 보여왔던 때와 달리 나른하면서도 위태로운 모습을 내비친다.

"가족간에도 의사 소통이 되지 않는다고 타박하지 말고, 그저 서로의 존재 자체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면 뭔가 트일 것 같아요. 물꼬가 트이는 거죠. 의사 소통의 방식을 이런 식으로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하나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영화입니다. 처음엔 '가족영화'라고 규정짓지 않으려 했는데 저 역시 보고나니 부모와 자식이 함께 와서 서로 다르게 느껴갈 수 있는 가족영화라는 생각이 드네요."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서로에게 덤덤한 가족 관계를 설명해주는 밥 먹는 장면에서 아내가 가운데 혼자 앉고 아버지가 한 켠에 밀려나 있는 게 현대 사회에서 아버지의 위치를 설명해주는 것이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뜻밖의 대답. "어, 난 전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실생활에서 천호진은 아내에게 식탁의 가운데 자리를 내줬기 때문이란다. 결혼 후 자식을 낳은 이후 쭉.

"이상하게 아내를 거기 앉히고 싶었어요. 제가 그 자리에 앉지 않는다고 해서 권위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감독과 그에 대해 별다른 소통은 하지 않았지만 무슨 기조가 깔려있을 것 같네요. 제 아무리 무슨 일이 일어나도 가족이 되기 위해 뭉치는 일말의 끈 같은 의미 말이죠."

배우 천호진에 대해 물었다. 최근만 해도 그는 '비열한 거리'에서 아주 비열하게 악역을 소화해냈고, '삼거리 극장'에서 음울하고 삶에 지친 극장주를 연기했으며 '범죄의 재구성'에서 만난 최동훈 감독이 언젠가 다시 만날 기대를 하는 배우로 꼽을 만큼 이 즈음의 영화 감독들에게 각인된 배우다.

"별 거 없어요. 그저 영화가 좋아서 감독과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좋아할 뿐이죠. 그것 밖엔 한 게 없는데 왜 감독들이 나를 좋아하는지 꼽으라니, 참…"이라며 쑥스러워 한다.

그러면서 그는 "다만"이라는 전제로 말을 이어갔다.

"연기를 시작하면서부터 휴머니즘이 담긴 영화나 드라마, 인간이 보이는 배역을 선택하려고 했습니다. '공포의 외인구단'이란 영화에서 마동탁 역을 맡았는데 제가 보기에는 주인공 까치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는 캐릭터라고 생각했어요. 결국 사람 이야기잖아요. 그렇지만 사기꾼은 맡고 싶지 않아요. 전 살인자보다 나쁜 사람이 사기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기꾼은 인간의 정신을 말살시키니까요."

배우로서 든든한 밑받침이 되고 있는 그는 영화와 드라마의 제작 현장에 대해 우려의 심정을 나타냈다. 시나리오를 발굴해야 하는 영화계의 숙제부터 "예전보다 훨씬 많이 나빠져버렸다"고 표현한 드라마 제작 방식의 문제까지.

그러면서도 그는 "'좋지 아니한가'처럼 열심히 한 작품이 생각한대로 적절하게 나왔을 때 배우로서 행복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배우로서 그의 목표이자 바람은 딱 한 가지다. "관객이 '천호진이 그 작품을 했다'면 믿어주고 찾아 줄 수 있으면"이라는.

배우로서 가장 큰 꿈을 품고 있는 천호진이 그 꿈을 품을 만한 배우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이가 없으리라는 건 분명하다.

kah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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