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하는 누구..최단명 재임기록의 파란만장한 삶

2006. 10. 22.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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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키 정치] 최단명 재임기록을 갖고 있는 최규하 전 대통령은 신군부가 등장하는 격변기에서 실권도 없는 최고 통치자로 굴절된 한국 현대사를 지켜봤다.

◇외교관에서 대통령까지=1919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난 최 전 대통령은 6살 때 효경(孝經),7살 때 명심보감을 암송할 정도로 어릴 때부터 두뇌가 명석했다. 학창시절에도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를 전교 2등으로 졸업할 정도였다. 경성고보 4학년이던 1935년에는 부모님 뜻에 따라 고 홍기 여사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고학으로 동경고등사범학교 영문과를 졸업했고,만주 다퉁학원에서 정치행정학도 수학했다.

그는 1946년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공무원 길에 들어섰다. 1948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국제식량기구(FAO) 아주지역 미곡위원회 회의에 한국대표로 참가해 외교적 수완을 발휘,당시 변영태 외무장관에 의해 외무부 통상국장으로 발탁됐다. 이어 1959년 외무부 차관,1963년 최고회의 의장고문을 맡는 등 초고속 승진했다. 1967년 외무부 장관에 올라 '외교통 최규하'의 진면목을 드러냈다. 1968년 푸에블로호 납북사건 때는 사이러스 밴스 미국특사와 담판을 벌여 현재 한·미 연례안보협의회(SCM) 효시가 된 한·미 국방각료 연례회의를 요구해 성사시켰다. 1975년 12월19일 국무총리에 오른 최 전 대통령은 총리로 재임한 4년 동안 무리 없이 국정을 이끌었다.

◇비운의 대통령=최 전 대통령은 재임기간이 1년도 되지않으나 1979년 12·12 신군부 쿠데타와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등 격동의 시간을 보냈다. 최 전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9년 10·26 사건으로 유고되는 사태가 벌어지자 뜻하지 않게 최고 통수권자가 된다.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은 그는 당시 측근들에게 "하고 싶어도 그렇게 되지 않으며,하기 싫어 버텨도 안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최 전 대통령은 우여곡절 끝에 그해 12월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당시 집권 공화당 당의장이었던 박준규 전 국회의장은 훗날 "생활화된 민주주의자,절대권력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국제적 배경이 있는 사람,비(非) 경상도 출신이 대통령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그를 대통령으로 '선택'한 배경을 술회했다.

최 전 대통령은 대통령 선출 일주일후 12·12 쿠데타를 겪은 뒤 12월21일 제10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정식으로 대통령에 취임할 즈음에 이미 실권을 전두환 보안사령관 등 신군부에 빼앗긴 상황이었다. 최 전 대통령은 이듬해 8월16일 "광주사태 등에 정치적·도의적 책임을 지고,평화적인 정부이양의 선례를 남기며,새로운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여 후진에게 길을 연다"는 하야성명을 남기고 쓸쓸히 권좌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최 전 대통령 하야에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혹들이 있다. 그는 1980년 6월12일 특별담화를 통해 '10월 개헌,1981년초 선거,6월 정권이양' 등의 정치일정을 제시한 바 있다. 신군부에 의해 급작스럽게 �i겨났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안의근 기자 pr4pp@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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