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 특집]1년 내내 명절같은 연극가족 전무송씨네

2006. 9. 27.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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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밤 열두시가 넘어도 자식들이 들어오면 일어나 늦은 귀가를 맞는다. 식사를 거른 날은 손수 저녁상을 봐주고 도란도란 하루 일을 나눈다. 스무 살에 첫사랑을 만나 사십년 넘게 배고픈 연극쟁이 남편의 뒷바라지를 한 어머니는 아들과 딸을 모두 연극배우로 키워냈다. 딸은 아버지를 보며 연극배우의 꿈을 키웠고, 아들은 누나를 보며 연극배우가 되고 싶었다. 처남과 형제처럼 지내는 사위까지 연극연출을 하는 덕에 지금은 한가족이 모두 연극으로 먹고 살고 있다. 연극쟁이의 삶이 '배고픈 광대의 표상'처럼 여겨지는 시대지만 추석을 앞둔 이 연극쟁이 집안은 풍요로 넘쳐난다. 하고 싶은 일들을 하고 사는, 연극배우 전무송씨(65)네 이야기다.

경기 파주의 전무송씨 집에 연극으로 먹고 사는 가족들이 다 모였다. 딸 현아씨(34)와 아들 진우씨(31)는 연극배우로 무대에 서고 있고, 사위 김진만씨(36)는 연극연출을 하고 있다. 색색깔로 입은 한복이 곱다. 서로 옷고름을 잡아주고 매무새를 정리한다. 만지나 안 만지나 모양새는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 가족의 마음은 그게 아닌가 보다. 전무송씨가 종종 아들의 이름 대신 부를 정도로 아낀다는 강아지 '쵸코'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가족들의 주위를 맴돈다. 웃으라고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웃고 있는 이 가족. 특별한 포즈를 취하지도 않았는데 서로 감싸 안고 있는 듯 따뜻한 모습이 자연스럽다.

추석 계획을 물으니, 다같이 웃으며 "없다"고 말한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 출연 중인 진우씨는 추석때도 어김없이 공연을 해야 하고, 현아씨와 진만씨도 다음달 12일부터 무대에 오르는 연극 '가스등' 준비에 바쁘기 때문이다. 경기도립극단 예술감독에 재직 중인 전무송씨도 11월부터 오르는 무대 준비를 해야 한다. "서운하시겠다"고 말하자, 어릴 적부터 남들 노는 날 안 노는 데 익숙한 가족들이 명쾌한 답을 내놓았다. "저흰 매일이 명절이에요." 언제나 신발장에 신발이 가득한 이 가족은 명절이 아니라도 자주 모이기 때문이다. 현아씨 부부가 친정과 차로 15분 거리에 살아 별다른 일이 없어도 귀가길에 종종 들른다. 결혼 초기에 한집에 살아서 그런지 여전히 한집 식구 같다. 진우씨는 "많이 의지하던 누나가 결혼을 한다고 해 한편으로 시원하면서도 섭섭했는데 이렇게 자주 볼 줄은 몰랐다"며 익살맞은 웃음을 던졌다. 가족이란 명절이 아니라도 자주 모이는 게 당연한 것을, 독서가 생활인 사람에게 가을이니 책 많이 읽으라고 권한 듯 부끄러웠다.

전무송씨 부부는 "그래도 추석인데 현아는 시댁에 가야 할 것"이라 했지만, 연출가 진만씨는 어림없다는 표정이다. "다른 배우들도 다들 나와서 연습하는데 예외가 없다"며 단호하다. 전무송씨는 "아내와 함께 인천 본가를 찾아 부모님께 인사 드리고 큰아버지 묘소에 다녀와야겠다"며 웃었다.

매일을 명절처럼 사는 이 가족에겐 당연히 함께 모여 밥먹을 일도 많다. 진만씨와 진우씨가 장을 보면 어머니는 음식을 하고, 현아씨는 상을 차린다. 설거지는 아버지 몫이다. 예순을 훌쩍 넘긴 아버지가 설거지라니. 놀랄 법도 하지만, 이 가족이야기를 듣다보면 이상할 일도 아니다.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역할이 바뀐다.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남편, 누나와 동생의 할 일도 따로 없다. 부모도 속상하면 자식에게 털어놓고, 매형과 처남의 거추장스러운 이름표도 떼어버린 지 오래다. 이들은 그저 가족, 살 맞대고 마음 비비며 사는 가족이다.

'연극'이라는 꿈으로 뭉친 이들은 밖에서 더 자주 만난다. 극단 '꼭두'의 대표를 맞고 있는 현아씨와 진만씨는 부부로 집에 있는 시간보다 배우와 연출가 사이로 밖에 있는 시간이 더 길다. 올해 초 진만씨가 연출한 연극 '상당한 가족'에 전무송씨, 현아씨, 진우씨까지 함께 무대에 오른 적도 있어 이들은 만나고 얘기하는 게 다 일이고 생활이다. 아무리 가족이 좋다지만, 집에서도 일터에서도 계속 마주쳐야 하는 서로가 부담이 되진 않을까. 연극계의 스타를 장인으로 두고, 아내와 처남의 연기를 지도해야 하는 진만씨가 미소를 머금고 말을 꺼냈다.

"어떻게 들으실지 모르겠지만, 일할 땐 이분들이 가족으로 생각되질 않아요. 그냥 배우로 보일 뿐이에요. 같이 있는 시간이 많으니까 연극 얘기도 더 많이 할 수 있고 호흡이 더 잘 맞는 편이에요. 안좋은 점은…정말 모르겠어요."

진우씨도 "배우들도 오히려 더 편하다"며 거든다. 현아씨는 서로를 이해하고 믿을 수 있기 때문에 더 좋다고 말했다. "제가 원래 반항끼가 좀 있어서(웃음), 이 사람(진만씨)하고 일할 때도 처음엔 딴죽을 많이 걸었어요. 근데 생각해보니 제가 연극 외적인 것으로 투정을 부리고 있더라고요. 지금은 믿고 더 잘 이해하는 것 같아요."

지금이야 마음 놓고 연극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이 가족이 모두 연극쟁이가 되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고생스러운 연극쟁이 생활을 누구보다 잘 아는 전무송씨 부부는 현아씨가 연극을 하는 것을 말렸다. 현아씨는 지름길 대신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음악을 하겠다며 국악예고에 들어갔지만, 실은 나중에 연극을 위해 배워두면 좋겠다는 깊은 뜻이 있었다. 결국 현아씨의 정성에 아버지도 어머니도 딸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동생 진우씨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대학원서 접수를 할 무렵 갑자기 연극을 하겠다고 나서 부모님을 놀라게 했다. 진우씨는 아버지보다도 누나의 모습을 보고 연극에 빠져들었다. 유난히 사이가 좋은 남매는 이렇게 꿈도 나눴다. 부모님은 걱정이 많았지만, 진우씨는 그해 서울예술대학교에 차석으로 입학했고, 졸업 때도 수석을 차지했다.

초등학교 3학년때 아버지가 연기하는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며 혼자 깔깔거리며 웃었던(그 심각한 극을!) 진우씨는 지금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럭키'를 연기하고 있다. 진만 씨가 연극 연출을 하게 된 데는 아내 현아씨와의 만남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던 진만씨는 현아씨가 직접 쓴 극본을 읽고 무대로 가시화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연출로 무대를 만들면서 어렸을 때부터 해 온 연기경험이 정리되며 무대에서 살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가 2000년, 진만씨는 제대로 공부를 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장인의 조언을 받아들여 2001년 서울예대 드라마센터 동랑미디어아트센터 전문가 과정을 이수했다. 1년간 공부하며 새로운 길에 눈을 뜨게 된 진만씨는 이후 연출가 임영웅 선생 밑에서 '산불'을 조연출하고 실력을 인정받았다.

연극 이야기에서 좀 빠져나오고 싶어 소소한 일상을 들려달라고 했다. 연극을 떠나 어떤 부모고 어떤 자식일까. 이 자리를 빌려 흉도 좀 보시라고 부추겼다.

전무송씨는 대뜸 "너무 게을러. 너무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고. 연습이 없으면 계속 잠만 자고"라며 꼬집었지만, 이내 "그게 날 닮아서 그렇지 뭐. 연극하는 사람들이 원래 그래. 연습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어"라며 두둔했다.

지금도 자상한 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아이들에게 유난히 정이 많았다. 저녁에 나가고 낮에 집에 있는 직업 탓에, 아버지는 유치원에 다녀온 아들, 딸이 미주알 고주알 꺼내는 얘기를 다 들어주었다.

아이들은 매일 그날 그날 있었던 일을 빠짐없이 묘사하고 설명했다. 아버지가 나가고 없는 저녁때는 어머니가 같은 역할을 했다. 같이 놀라고 기뻐하고 화도 내고 웃고 울며 아이들의 더없이 좋은 친구가 되었다.

지금도 밤 열두시가 됐든, 한시가 됐든 하루일과를 부모님께 얘기하는 버릇이 남아있다. 아버지는 저녁을 거른 자식들에게 손수 저녁상을 봐주기도 한다. 냉장고에 남은 반찬을 모아 만든 '섞어찌개'의 맛이 일품이란다. 이웃집에서는 열두시가 넘어야 시끄럽다고 '도깨비집'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기도 했다. 명절때도 남자건 여자건 가릴 것 없이 시간 되는 사람이 장도 보고, 송편도 빚고, 설거지도 한다.

지금은 소녀처럼 강아지 쵸코의 재롱을 귀여워하는 어머니지만 현아씨와 진만씨는 강하고 엄했던 '어머니의 힘'을 기억한다. 풍족할 리 없는 연극쟁이 남편을 뒷바라지하던 어머니는 오랫동안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기도 했다. 현아씨와 진우씨가 어렸던 어느날, 아버지는 결혼할 때 장만했던 피아노가 집 밖으로 실려 나가는 것을 보았다. 형편이 어려운 것을 말도 못하고 어머니가 대신 피아노를 처분하기로 한 것이었다. 혼자 속앓이를 했을 아내 생각에 아버지는 대본을 집어던지며 당장 야채장사라도 시작하겠다고 나섰다. 그때, 어머니는 "나는 연극배우 전무송과 결혼했지, 장사꾼과 결혼한 게 아니다"라며 대본을 집어들었다. 현아씨와 진우씨, 진만씨는 "지금도 부모님은 연극에만 매진할 수 있게 도와주신다"고 했다.

아무리 얘기를 해도 결국 끝은 연극 이야기로 빠지고마는 이 가족. 행복의 비법은 끊임없는 대화다. 전무송씨는 "문제가 생기면 꼭 자식들 의견부터 물어요. 각자 꼭 한가지씩 의견을 내야 하죠. 그리고 나서 제 생각을 말해요. 아이들은 아버지가 손을 놓고 있다고 투덜대기도 하지만, 실은 일부러 그러는 거예요"라고 한다.

진만씨는 "아버님(장인을 꼭 아버님이라고 부른다)이 어떤 일을 결정할 때든 믿고 맡겨준신다"고 말했다. 이름도 비슷한 진우씨와 진만씨는 형제 사이가 된 지 오래다. "형, 술 한잔 해요, 밖에서"가 진우씨가 진만씨에게 던지는 일종의 SOS다. 현아씨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가장 이상적인 부부"라며 "우리도 부모님처럼 연인 같고 친구 같은 부부로 늙고 싶다"고 말했다.

장인과 사위는 혈액형이 같고, 매형과 처남은 대본에 낙서 안하는 버릇이 닮았고, 아버지와 아들, 딸, 사위가 술 마시면 재채기하는 버릇까지 닮은 이 가족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펄벅이 한 말이 떠올랐다. "가정은 나의 대지다. 나는 거기서 정신적인 영양을 섭취하고 있다."

〈글 장은교·사진 박재찬기자 ind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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