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문희, 당신의 팬이 되겠어요!

2006. 4. 21.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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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조은미 기자] <굿바이 솔로> 미영 할머니(나문희)를 보다 부러웠다. 아니 천정명과 배종옥이 부러웠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도 저런 할머니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미영 할머니는 젊은애가 무슨 말을 해도 가만히 들어주고, 바라봐 줬다. 나쁜 소리라도 할라치면 말 못하는 이 할머니는 얼른 칠판에 썼다. "그러지마" 그렇다고 때리지도, 그러지 말라고 호되게 야단치지도 않는다. "그러지마" 이 한 마디에서 걱정과 안타까움과 사랑이 '뚝뚝' 묻어났다.

그걸 보며 알았다. 사람이 말간 게 저런 거구나. 사람이 순수한 게 저런 거구나. 미영 할머니를 보며 알았다. 말 한 마디 하지 않는데도 모든 게 다가왔다. 이건 그저 '굉장한 연기력' 정도가 아니었다. 보통 내공으로 할 수 있는 연기가 아니었다. 미영 할머니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에게선 비 내린 뒤 이른 아침, 아무도 걷지 않은 거리를 걸을 때 간간히 느껴지는 냄새 그런 냄새가 났다. 너무나 말갛다.

'고약한 시어머니'에서 <굿바이 솔로> 미영 할머니까지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깜짝 놀랐다. KBS 주말드라마 <소문난 칠공주> 때문이다. 거기에 미영 할머니, 아니 나문희가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니? TV를 보다 하마터면 입 밖에 소리 내어 말할 뻔 했다. "어, 어? 할머니. 누구세요? 어느 별에서 오셨어요?" 그 할머니는 내가 아는 말간 할머니가 아니었다. 아닌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딴 사람이었다. 그냥 이목구비가 약간 닮은 듯한 사람 정도였다. 세상에. 저 막가파 할머니가 당최 누구야?

그녀가 나문희였다. 그리고 또 떠올랐다. 맞다. <내 이름은 김삼순>의 그 세련되고 당당한 나 사장이 떠올랐다. 생각해보니 그녀도 나문희였다. 어디에도 할머니 같지 않고, 어디 내놔도 전혀 꿀리지 않으며, 당장 여성 총리로 선임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듯이 삐까번쩍한 커리어 우먼이었다. 여장부 같은 CEO 모습이었다.

한껏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쟤 뭐니?' 이런 식으로 내려보며 나 사장은 권위가 살아있는 목소리로 삼순이에게 물었다. "부모님은 뭐하시고?" 그리고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얼굴로 엘리베이터 안에 서 있다가, 돌아서서 현빈을 후려치는 나 사장이었다. 세상에. 미영 할머니와 이 세련된 CEO가 같은 사람이라니, 상상이 가나? 어디 그뿐이랴.

기억 창고를 뒤지고 포탈 사이트 창고를 뒤지니까 또 나왔다. 알고 있었지만 묻어둔 기억인가? 나문희는 <장밋빛 인생>의 그 그악한 시어머니였다. 불쌍한 며느리 최진실을 구박하거나 아니면, 입술을 심술 맞게 추켜올리며, 죽은 남편의 첩이었던 미스 봉 혹은 쭈꾸미를 구박하던 끝순이 아니 '문어' 할머니였다. "내는 문어고, 니는 쭈꾸민기라" 요런 사투리를 써가며 며느리 최진실을 구박하다가도, 최진실이 맛있는 걸 해주며 구워삶으면 '헤헤'거리며 좋아하는 단세포 할머니였다. 악다구니로 살아온 한 평생, 시어머니였다. 세상에. 이 모든 게 그였다. 나문희였다.

이 드라마를 해도 그 얼굴, 저 드라마를 해도 그 얼굴인 배우들과 달랐다. 한 번도 이상하다고 느껴보지 못했다. 지금 하는 드라마를 보면, 과거에 다른 배역은 새까맣게 잊었다. 기억도 안 났다. <굿바이 솔로> 이전에 그가 한때 '고약한 시어머니 전문 배우'였단 것도 기억 안 났다. <소문난 칠공주>를 보고 알았다. 세상에. 미영 할머니가 '고약한 시어머니 전문 배우'와 같은 사람이라는 게 상상이 가나?

연기생활 45년, 아직도 고민하고 연구할 게 많은 배우

"가장 뛰어난 영화배우는 아주 뛰어난 부분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다."

히치콕 감독은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 수많은 영화를 찍고, 지금도 영화감독들의 연구 대상인 히치콕 감독이 보는 배우는 그랬다. 신들린 배우, 척 보면 눈에 확 띄는 사람,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배우는.

나문희야말로 어쩌면 그런 사람이다. 아니, 배우다. 뛰어나게 아름다운 미모를 자랑하지도 않고, 어떤 스타일로 콕 집어 기억되지도 않는다. 왜 그런가 생각해보니, 그는 드라마를 찍을 때마다 달랐다. 극과 극인 인물을 연기해도, 100년은 그 인물로 살아온 것 같은 딱 그 사람 자체였다.

"하하. 미영 할머니가 왜 저렇게 욕쟁이 할머니가 됐어? 이상해."

이런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 생각조차 들게 하지 않았다. 신기하지만 그랬다. 그가 나오는 순간마다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게 사람을 산낙지처럼 쫘악 끌어들였는데도 그랬다. 왜 그랬을까? <굿바이 솔로>를 쓴 노희경 작가는 <씨네21>과 인터뷰에서 나문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배우가 사랑스러운 건 그 경력에도 여전히 생짜라는 거다. 아직 매 순간순간이 서투르다. (중략) 대부분 그 나이쯤 된 배우들은 어느 정도 이야기하면 '그래, 무슨 말인 줄 딱 알겠어'라고 하지만, 나문희 선생님은 한결같이 '고민할게. 연구할게'라고 말하신다."

우리나라 나이로 예순여섯 살이며 1961년 MBC라디오 공채 성우 1기로 연기계에 입문한 이 배우가 이렇게 말한다는 거다. 연기계에 입문한 지 45년이 된 이 대배우가 이런 소릴 한다는 거다. "고민할게. 연구할게."

이 배우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연기를 너무 많이 좋아한다. 한번도 힘들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이 서른만 넘어도 좋아서 한 자기 일에 진저리를 내는 이들이 투성이인데, 그저 돈벌이용 노가다로 하는 이들이 쌔고 쌨는데, 더구나 배우는 아르바이트이고 본업은, CF모델인 이들이 줄을 섰는데, 그는 어떻게 60이 넘어서도 이렇게 열정을 불태울 수 있을까? 언제나 마음은 불타는 청춘일 수 있을까?

다시 '나문희의 해'를 꿈꾼다

지난해 나문희는 영화 <주먹이 운다>로 대종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너는 내 운명>으로 부산영화평론가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또 대한민국영화대상에서는 이 두 영화로 여우조연상 후보로 두 번 올랐다. 청룡영화상도 여우조연상 후보였다. 지난해는 사실 '황정민의 해'가 아니라, '나문희의 해'였다. 60이 넘은 여배우 나문희의 해였다. 또 배우들이 동종 업계에서 가장 닮고 싶어 하는 배우, 가장 질투하는 배우가 또 그다. 바로 나문희다.

▲ 지난해 나문희는 영화 <너는 내 운명>으로 부산영화평론가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지난해는 사실 '황정민의 해'가 아니라, '나문희의 해'였다.
ⓒ2006 영화사 봄

황정민은 지난해 대한민국 영화대상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말했다.

"나이를 먹어도 배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해준 나문희 선생님을 정말 존경합니다."

<굿바이 솔로>의 천정명은 "나문희 선생님께서 연기지도 해 주셔서 그때 감을 잡았다"고 했고, < S다이어리 >를 찍고 나서 김선아는 "나문희 선생님은 정말 최고다"고 말했다. 송윤아도 한 인터뷰에서 가장 존경하는 선배로 그를 꼽으며 말했다. "대본 속 감정을 가장 절실하게 느끼는 배우다." 어디 그들 뿐이겠나?

낼 모레 70인데도 항상 도전하길 멈추지 않는 이 배우는, 올해 초엔 <천상시계>란 뮤지컬도 찍었다. 그의 인생에 처음 해보는 뮤지컬이었다. 뮤지컬이니 물론 그는 노래를 불렀다. 현재 드라마 <소문난 칠공주>에 출연 중이지만, 최근엔 주연배우로 영화 <열혈남아>를 찍었다. 설경구와 같이 했고, "역시 나문희였다"는 소문이다. 멋지지 않나?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는 연극이 있다. 그를 보며 이 제목을 생각했다. 연기의 바다를 아는 그는, 날마다 바다를 발견할 게 틀림 없다. 언제나 노력하며, 언제나 즐기며 발견할 게 틀림 없다. 그렇게 자신이 발견한 바다를 사람들에게 보여줄 게 틀림 없다. 대한민국 오만 가지 여자의 모습을 확실하게 보여줄 게 틀림 없다. 그는 그럴 게 틀림 없다. 소름 끼치도록 짜릿하게. 그 바다가 보고 싶다. 언제나 보고 싶다.

/조은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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