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은택의아메리카자전거여행] 뒷바퀴 대서양에, 앞바퀴 태평양에 '풍덩'

2006. 4. 14.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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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홍은택의 아메리카 자전거여행 (47)

<18.0> 첫 호부터 비상한 관심과 응원속에 연재해온 '홍은택의 아메리카 자전거여행'이 이번 호 47회를 끝으로 대장정의 막을 내립니다. 과감한 도전정신으로 온갖 어려움을 뚫고 한국 자전거여행사에 남을 신기원을 이룩하면서 그동안 <18.0> 독자들을 행복하게 해준 필자 홍은택씨에게 격려와 감사를 드립니다.

사람의 마음이, 아니 내 마음이 얼마나 약한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이제 다 왔는데도 아

직 확신이 들지 않는다.

마라톤 대회나 철인 3종 대회를 앞두고 전날 잠을 설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나도 대회가 있는 날 아침 상쾌한 기분으로 일어난 기억이 없다. 컨디션을 조절하기 위해 일찍 잠을 청하지만 멀뚱멀뚱 눈을 뜨고 밤을 새우기 일쑤다. 그래도 잠을 못 잤기 때문에 대회를 망친 적은 없다. 선수들은 경기 전 60시간을 안 자도 같은 몸의 조건으로 경기를 치를 수 있다고 한다. 비일상적인 순간에는 몸도 비일상적으로 반응한다.

6400㎞의 여정을 마무리하는 날 나는, 그런데, 늦잠을 잤다. 밤 9시쯤 잠들었는데 오전 8시에 일어났다. 무사태평이어서 그런 게 아니라 하루 쉬고 갈까 망설인 점을 몸이 기가 막히게 알고 파고든 것이다. 오늘 150㎞를 달려야 하는데 너무 늦게 출발하면 밤 늦게 도착할 테고, 태평양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기왕 늦은 김에 몸도 무거운데 하루 쉬고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자. 몸은 그런 유혹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게 유혹이 아니라 정당한 논리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번 그런 유혹에 넘어가면 결과가 어떻게 될지 불안하기 때문에 나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만큼 약한 것이다.

6400km 여정 마지막 날 늦잠을 잤다하루 쉴까 망설인 마음을 몸이 알아챈 것종착점 105km 남겨두고도 '생각의 유희'돌아갈까 끝까지 못가진 않을까5마일 4마일 3마일…눈물 흘리지 않으리라

자전거포 주인이 가르쳐준 대로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유진 시내는 여전히 길 찾기가 어렵다. 노스웨스턴 익스프레스를 찾아서 타고 가다 36번 길을 발견했다. '플로렌스까지 66마일(105.6㎞)'이라는 이정표를 보고 흥분되기 시작했다. 이제 끝을 향한 마지막 레이스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믿어지지 않는다.

마라톤 첫 완주 때 눈물 왈칵

바다를 어서 보고 싶은데 바다는 여전히 느껴지지 않는다. 길은 오히려 산지로 올라간다. 대서양에서 출발해 6300㎞를 왔는데도 여전히 산적들처럼 고개들이 나타난다. 그리곤 바다 대신 호수가 나타났다. 사람들은 이 호수에서 배를 타고 물놀이를 했다. 이상했다. 바다가 지척인데 왜 여기서 놀지. 한적한 길 주변에는 산딸기가 지천이다.

산딸기만으로는 배를 채울 수 없어 데드우드(Deadwood)에 있는 가게에서 멕시칸 음식인 부리토를 사서 가게 앞 턱에 앉아서 먹는데 무더운 여름 햇살이 내리쬐고 있다. 그 때 문득 터무니 없고 엉뚱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 떠올랐는데 '여기서 그냥 돌아가버릴까' 하는 것이었다. 그 무진 고생과 노력을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아무리 스쳐가는 생각이라도 태평양을 보지 않고 돌아선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왜 그런 생각이 떠오를까. 나는 내가 약해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끝까지 다 와서도 끝까지 갈 수 없을지 모른다는 회의를 지우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회의는 오랜 습관이어서 어떤 상황에서든 틈만 보이면 벌레처럼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그래서 급기야는 불과 결승점을 몇 미터 앞에 두고 경기를 포기하는 마라토너의 이미지를 자신에게 투사하는 것이다. 아니면 중도포기를 가정함으로써 이제는 끝까지 갈 수 있게 된 상황을 재확인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생각의 유희인지 모르나 그런 가정을 하는 것 자체가 희한했다.

스스로에 대해 씨익 웃어주며 다시 자전거에 올라탔다. 플로렌스로 가기 위해서는 메이플턴(Mapleton)에서 악몽 같은 126번 길을 다시 타야 한다. 메이플턴에 도착해서 루트 비어를 사 마시며 마지막 숨을 다스렸다. 사람들이 찾아와서 어디까지 가느냐고 해서 플로렌스까지 간다고 하니까 얼마 안 가네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다 그러다 "어디서 왔느냐"고 해서 대서양에서 출발했다고 하니까 눈에 온통 흰자위만 보인다. 내 손을 붙잡고 흔들면서 정말 만나서 영광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의 흥분과 내 어조의 담담함은 대조를 이뤘다. 왠지 마음이 가라앉는다. 자기 연민이 강한 나는 이 정도의 성취라고 하면 벌써부터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100㎞는 족히 울고 달렸을 것이다. 실제 2000년 첫 풀 코스 마라톤의 결승선을 통과한 뒤 그 동안 무슨 설움이 그렇게 쌓였는지 울음이 복받쳐서 창피해서 혼이 났다.

아마 바람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메이플턴에서 플로렌스까지는 14마일(22.4㎞) 구간에는 바다에서 묵직한 바람이 불어와 다른 데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13마일, 12마일, 여전히 바다는 느껴지지 않는다. 바람에는 소금기가 없다. 바다에서 불어온다는 증거는 없다. 길은 아름다운 시슬로 리버(Siuslaw River)를 따라간다. 이 강물도 나처럼 오랜 굴곡과 요철을 겪으면서 이제 바다로 골인하기 직전이다.

강물처럼 묵묵히 페달을 밟았다. 가다가다 보면 끝이 나오겠지. 8마일, 7마일, 6마일. 마음이 풀어지면서 점차 감상적으로 바뀌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마흔이 넘은 나이에 나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싶지는 않다. 3마일(4.8㎞) 지점까지 달릴 때까지 저 너머에 바다가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점차 갯내음이 약하게 느껴진다. 건너편 차선에서 짐을 잔뜩 실은 바이크 라이더가 동쪽으로 가고 있다. 그는 플로렌스에서 이제 출발해, 대서양으로 가고 있는 것 같다. 어이구,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내가 끝내는 긴 여행을 이제 시작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어쩜 계주 선수들처럼 바통을 터치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대서양에 도착하면 또 다른 누군가가 바통을 이어받아 서쪽을 향해 출발할 테고. 그렇게 삶은 이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2005년 8월13일 가슴에 새기다

플로렌스는 강변에 있지, 해변에 있지 않았다. 바다가 보이지 않아 당황했다. 물어보니 바다까지는 몇 마일을 더 가야 한다고 한다. 그것은 낙타 등의 마지막 지푸라기였다. 낙타 등에 짐을 싣고 싣다가 나중에는 지푸라기 하나만 더 얹었을 뿐인데 그게 하필이면 임계점을 넘은 것이어서 낙타가 자빠져버리는. 하버 비스타(Harbor Vista)로 가면 바다로 갈 수 있다고 해서 바닥난 인내심을 딱딱 긁어서 가는데 강풍이 불어왔다. 급속히 기온이 떨어져 벌벌 떨었다. 가는 길에 주택들 사이로 얼핏 보이는 바다는 물 안개 속에 숨어 있다. 나는 따뜻한 바다에 첨벙첨벙 물을 차고 들어가는 것을 여행의 마지막 순간으로 예상하고 달려왔는데…

태평양은 보이지 않는다. 하버 비스타 근처에서 해변을 발견했다. 여전히 바다는 둑 넘어 있지만 더 이상 추워서 갈 수 없었다. 관광객에게 부탁해서 짐수레를 떼어내고 자전거를 들고 물에 들어가 앞바퀴를 바닷물에 담갔다. 2005년 8월13일 오후 5시51분. 이 순간을 가슴에 새겼다. 뒷바퀴는 여행 출발할 때 대서양에 담갔으니까 자전거의 앞뒤바퀴가 두 대양 사이를 걸치게 됐다.

여행을 끝냈다는 감흥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너무 추웠다. 몸이 뻣뻣해져 굴신이 쉽지 않을 정도다. 바로 그 지점에서 롤랜드라는 운전자를 만나 근처에 있는 모텔까지 태워달라고 부탁했다. 이제 6400㎞의 주행경력을 가진 '당당한' 라이더가 모텔까지 가는 몇㎞를 달릴 수가 없어 자동차 신세를 지다니.

플로리다 주 탬파 베이(Tampa Bay)에서 온 56살의 롤랜드는 캔자스에서 만난 데이비드를 연상시키듯 부드러운 목소리의 소유자였다. 흰 콧수염을 기르고 얼굴빛은 붉다. 그는 나와 내 자전거, 짐수레를 차에 싣고 모텔을 찾아주기 위해서 플로렌스 일대를 헤집고 다녔다. 그는 자신이 텐트를 친 사이트에 같이 텐트를 쳐도 좋다고 했지만 나는 종착지에 도착한 기념으로 온욕도 하고 인터넷도 맘껏 하고 싶었다. 나는 역으로 "비싼 방이라도 좋으니 방을 구하면 너도 텐트 걷어서 내 방에 와서 함께 자자"고 했다. 그도 어제 추워서 잠을 제대로 못 잤다면서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빈 방이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빈 캠프 사이트도 없었다. 10개 주를 헤집고 오는 동안 빈 방이 없거나 캠프 사이트가 없어서 찾아 헤맨 적은 한번도 없었다. 종착지에서 이런 일을 당하다니.

롤랜드에게 유진에 가면 빈 방이 있을 테니 거기까지 같이 가자고 뻔뻔스럽게 요청한 뒤 함께 타이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는 동안 나는 그가 일곱 명의 자녀를 둔 아버지라는 것을 알게 됐다. 20대에 히피였던 그는 병역도 거부하고 해외에 나가 인도와 스리랑카에서 오래 살았다. 오랜 방랑을 마치고 귀국, 부동산 중개인으로 돈을 벌기 시작해서 지금은 집을 여러 채 월세 놓고 그 돈을 받아서 생활하고 있다는 것.

동쪽으로 가는 바이크 내가 끝나는 지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이가 있다태평양에서 대서양으로 바통 터치의 연속 그렇게 삶은 이어진다

그런데 왜 혼자 여행할까. 궁금해졌다. 직설적으로 묻기는 뭣해서 일곱 명의 자녀를 둔 것은 축복이라면서 그들과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뜻밖의 말을 했다. 그는 "어느 날 자식들을 모아놓고 '사실 나는 동성애자'라고 고백했더니 모두들 떠나갔다"고 말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자식이 그렇게 많은데 동성애자라니… 그는 아내와 사별하고 나서 더 이상 그의 성적인 지향성을 숨길 수 없었다고 말했다. 어릴 때 그의 아버지는 그의 동성애적 성향을 지우기 위해 그를 지하실에 묶어놓기까지 했다고 한다. 자신도 그것을 부정하기 위해 결혼도 하고 오랜 세월을 버텨왔으나 이제는 더 이상 숨기고 싶지 않다고 했다.

비싼 방서 기념 온욕 하려했더니

그가 겪었을 고통에 가슴이 아팠지만 한편으로 나는 여관에서 한 방에 그와 자는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자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만약 내가 영어를 잘해서 그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물어볼 수 있었다면 같이 잘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나는 동성애자가 아니거든. 그러니까 우리 그냥 잠만 같이 자는 거지? 다른 일은 안 할 거지?" 그래서 그가 딴 짓 안 하겠다고 다짐하면 같이 투숙할 수 있겠는데 그걸 어떻게 영어로 표현한담.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말을 바꿔 처음 그가 제안한 대로 그가 텐트 친 사이트에서 하룻밤을 보내자고 했다. 그 사이트는 좋았다. 그는 내게 따로 텐트를 칠 것 없이 자기 텐트가 넓으니까 그냥 들어와 같이 자자고 했다. 나는 코도 많이 골고 잠버릇이 사나워서 불편할 거라면서 따로 텐트를 쳤다. 왠지 내가 야박해 보인다.

나는 그렇게 아름답게 불을 피우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는 단을 쌓듯 장작들을 사각형으로 포개놓고 그 중간에 굵은 장작들을 마주보게 세워 불길이 올라갈 기둥을 만든 뒤 잔 나뭇가지들을 그 사이 바닥에 넣고 불을 피웠다. 불은 활활 타올랐다. 그가 건네준 보드카를 마시면서 나는 미국 횡단 자전거 여행의 마지막 밤을 마비시켰다.

이제 딱 달라붙어서 있어서 떨어지지 않는 누룽지 같은 일상으로 돌아갈 때다.

그 동안 짧지 않은 여행 함께 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고개 숙여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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