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의 선사시대 발자국 '돌아와요..'

2006. 4. 11.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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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조용필에 대해서 '한국 대중음악계의 전무후무한 슈퍼스타'라고 말하는 것은 진부하다. 그런데 '슈퍼스타 조용필 이전의 조용필'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그렇게 또렷하지 않다. 일단 산수를 하면서 그 기억을 더듬어 보자.

2003년 8월 잠실종합운동장에서 가졌던 조용필의 공연은 '조용필 35주년 기념 콘서트-더 히스토리(The History)'였다. '35주년'이라면 그의 데뷔 연도는 2003-35=1968 이니까, 1968년이라는 이야기고, 숫자 하나가 왔다 갔다 하는 한국식 계산을 감안한다고 해도 1969년이라는 이야기다. 여기서 '민증 까는' 관행이 허락된다면 조용필은 1950년생이고 그렇다면 1969년은 그가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나이다.

그런데 통상적으로 '조용필 1집'이라고 알려진 음반은 1980년에서야 나왔다. 발라드곡 '창밖의 여자', 댄스곡 '단발머리', 트로트곡 '미워 미워 미워'가 골고루 들어 있는, 그래서 1980년대 이후 한국 대중음악의 '3대 인기 장르'를 정의해 버렸다는 평가를 받는 그 음반 말이다. 이때 이후 조용필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하는 편이 낫겠지만, 1969년부터 1979년까지 조용필은 어디서 무엇을 한 것일까. 위 공연에서도 1979년 이전 그가 연주하고 녹음했던 곡들은 레퍼토리에 거의 포함되지 않았다. 즉, 이 시기는 조용필의 '히스토리'에 속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1970년대는 조용필의 경력에서 '역사'가 아닌 '선사시대'였던 셈이다.

그렇지만 한 곡만은 예외였는데, 그건 다름 아니라 '돌아와요 부산항에'(황선우 작사·작곡)다. 역사 이후의 곡들을 연주했던 2003년 공연에서도 이 곡은 레퍼토리에서 빠지지 않았다. 이 곡의 역사는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돌아와요 부산항'이 1976년에 발표되어 그해 겨울을 거쳐 1977년 봄까지 음악다방과 고고클럽에서 줄기차게 흘러나왔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버전이 처음 실린 음반이 '조용필과 영 사운드'의 스플릿 앨범, 그러니까 엘피 1면을 절반씩 나누어 제작한 앨범이라는 사실도 그 당시에 나온 음반들을 구경해 본 사람은 아는 일일 것이다. 이 곡이 최헌의 '오동잎', 윤수일의 '사랑만은 않겠어요' 등과 더불어 '트로트 고고'의 흐름을 폭발시켰다는 음악사적 평가는 이제 지루한 감마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곡의 역사는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간다. 1972년에 나온 조용필의 첫 독집 앨범(아세아, AALS-0002)의 뒷면 네 번째 트랙에 어쿠스틱 기타 두 대로만 편곡된 이 곡이 실려 있는 것이다. 편곡도 편곡이지만 가사도 조금 다르다. 한 예로 "목 메여 불러 봐도 대답 없는 내 형제여 /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라고 알고 있는 1절 마지막 부분의 16마디의 가사는 '1972년 음반'에는 "목 메여 불러 봐도 말없는 그 사람 /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님아"로 되어 있다. 이렇게 가사가 뒤바뀐 사연에는 70년대 중반 조총련계 재일동포의 고국 방문이 허용됐다는 배경이 있었다는 사실은 '대중가요의 사회사'라는 주제로 한번 연구해 볼 만한 점이다.

그런데 이 곡의 역사는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간다. 1970년 12월에 발표된 한 음반에 김성술이라는 가수가 '돌아와요 충무항에'라는 제목으로 이 곡을 녹음한 자료가 몇 년 전에 한 언론에 공개된 것이다. 이때의 가사는 또 달라서 "목메어 불러 봐도 소리 없는 그 사람 / 돌아와요 충무항에 야속한 내 님아"라고 되어 있고 작사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설왕설래도 있다. (사족: 김성술 씨는 1971년 12월 대연각호텔 화재 사건 때 유명을 달리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생각해 보면 그때는 대형화재 사건이 참 많았다).

노래의 선사시대에 대한 이야기는 그렇다고 치고 오늘은 조용필의 선사시대에 대한 이야기로 마쳐야 할 것 같다. 조용필은 위 음반이 나오기 1년 전 음반 데뷔를 한다. <뮤직칼 '사랑의 일기': 변혁 작편곡 제1집>(오스카, OR-1001)이라는 음반의 뒷면에 '조영필'이라는 이름으로 '사랑의 자장가' 등 세 곡의 노래를 부른 것이다. 저 이름이 오타인지 당시의 예명이었는지는 불명확하지만, "푸레이보이컵 쟁탈 가수왕"이라는 문구를 보건대 조용필이 분명하다. 이 문구는 이 연재에서 몇 차례 얘기했던 '보컬그룹 경연대회(혹은 그룹사운드 경연대회)'를 말한다. 이 대회에서 조용필이 노래 부를 때 드럼을 쳤던 사람은 '타악기의 거장' 고(故) 김대환이었다고 한다. 아, 이 복잡한 이야기는 다음 주에 한 번 더 풀어보아야겠다.

신현준/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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