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은택의아메리카자전거여행] 꿈을 꾼다, 해변따라 '코리안 트레일'

2006. 3. 10.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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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홍은택의 아메리카 자전거여행 (42)

호수에 잠겨 있다가 북극의 빙하가 내려와 둑을 터뜨리는 바람에 졸지에 육지로 떠오른 몬태나 주 미졸라는 인구 6만 명의 아름다운 소도시다. 몬태나 대학이 여기에 있다. 이틀 머무는 동안 입이 즐거웠다. 내가 좋아하는 월남국수집이 있고 한국음식점도 있다. 점심 때 주소를 보고 월남국수집을 찾아갔다. 일요일이어서 문을 닫았다. 너무 아쉬워서 식당 안을 기웃거리니까 주인 아주머니가 나와서 오늘 장사 안 한다고 했다. 물러설 내가 아니다. "이 집에서 월남국수를 먹기 위해 4800㎞를 자전거를 타고 달려왔다." 넉살도 늘었다. 월남사람인 이 아주머니는 배시시 웃으면서 들어오라고 했다. 나만을 위해 월남국수를 끓이고 월남 커피까지 대접했다. 텅 빈 식당을 혼자 차지하고 월남국수 먹는 기분이 삼삼하다. 자전거는 사람들 마음의 문을 연다는 말 맞다.

아주머니가 월남국수를 준비하는 동안 자전거에 지도를 가지러 나가서 보니 자전거 뒷바퀴가 주저앉았다. 일곱 번째 펑크. 그 전에 들른 자전거포에서 산 튜브로 다시 갈고 자전거포로 끌고 가서 타이어에 바람을 넣는데 이번에는 폭음탄 터지는 소리를 내며 여덟 번째 펑크. 뒷바퀴가 20인치라고 하지만 림의 실제 크기가 조금 작은 탓에 계속 펑크가 난다.

저녁에는 나라(Nara)라고 하는 한국 음식점에서 벤과 함께 식사했는데 이 식당은 미국의 다른 여느 한식당처럼 한국 사람이 일식당을 겸해서 연 식당이 아니라 미국인이 경영하는 한식, 일식 겸용 식당. 그런데 일식이라고 하지 않고 한식을 앞세운 것은 특이한 일. 보통 일식을 앞세운다.

'아메리카 트레일' 공동 창시자미졸라 지날때 꼭 들르라는 초청장즉석사진 찍어주며 '컬렉션'에 올린단다이유는 미국 횡단 첫 한국인이라나?왜 돌아가게 설계했나 물었더니지형을 보여주려 했다는 싱거운 대답

어쨌든 미국인이 요리한 한식은 처음 먹어보았다. 종업원들도 다 흰색 셔츠에 검정색 바지로 유니폼을 통일한 젊은 미국인 남녀들이다. 불갈비를 시켜서 가스 불에 구워먹었는데 맛이 괜찮았다. 고추장도, 된장도 없고 단지 고기를 입에 넣을 만한 크기로 한 점 한 점 썰어서 불에 구워 상추쌈에 싸먹는다는 것 외에는 한식과 닮은 점이 없었지만 그래도 스테이크보다 낫다. 그리고 김치와 숙주나물, 시금치무침은 진짜 한식. 소주 대신 일본 사케를 팔았다. 뭔가 졸가리가 없다. 그래도 한식이 미국인의 식성에 파고드는 것 같아 어깨가 으쓱했다. 종업원들에게 "음, 진짜 한국에서 먹는 갈비는 말이지…"하면서 잘난 척도 할 수 있다. 벤은 김치까지 맛나게 먹었다. 오늘은 벤에게 한 턱 쏘는 날이다.

뒷바퀴 또 펑크 여덟번째

먹는 얘기는 그만 하고, 미졸라에 온 이유는 어드벤쳐 사이클링 어소시에이션을 방문해서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의 공동 창시자인 그레그 시플을 만나는 것. 이번 여행을 앞두고 휴먼 파워드 비어클 저널(Human Powered Vehicle Journal)에 편지를 보내 미국을 횡단하는 동안 회원들을 만나보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했다는 것은 여행 초반에 쓴 바 있다. 이 편지는 이 저널의 뉴스레터에 인쇄돼 배포됐다. 하지만 회원들의 반응이 전무하다시피 해서 상심했다. 같이 혁명하자는데 동지들이 이럴 수 있는 거야. 원인은 회원들의 무관심이 아니라 지연된 인쇄에 있었다. 내가 일곱 번째 주인 와이오밍 주에 들어왔을 때야 뉴스레터가 인쇄돼 발송됐다. 이미 초대일자가 지난 초청장이 돼버린 셈이다. 딱 두 사람이 이메일을 보냈는데 결정적인 두 사람이었다.

한 사람은 토니 하들랜드(Tony Hadland)로 영국에서 유명한 자전거 저술가다. 그는 몰튼 자전거 클럽의 기관지인 <몰트니어(The Moultoneer)>의 편집장을 겸하고 있는데 몰튼을 타고 횡단하는 것에 반가워서 기고를 요청했다. 자전거 초심자가 가장 세련된 자전거족 기관지에 글을 싣는다는 것은 신데렐라가 되는 기분이다.

다른 한 사람은 그레그 시플. 그는 미졸라를 지나갈 때 꼭 들르라고 했다. 그는 어드벤처 사이클링 어소시에이션의 아트 디렉터로 일하고 있었다.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의 공동 창시자를 '알현'하는 것도 영광이지만 나는 그에게 꼭 물어볼 질문이 있었다. 미국 횡단길을 되도록 일직선으로 안 하고 이렇게 휘게 그렸는지가 궁금했다. 때로는 화가 날 정도로 돌아간다. 몬태나는 캐나다와 인접한 주다. 여기까지 올라올 이유가 없다. 물론 경치와 사람들이 그런 불만을 잠재우지만 그래도 도는 건 도는 거다.

시내에 있는 어드벤쳐 사이클링 어소시에이션은 장거리 바이크 라이더들에게는 성소와 같은 곳이다. 건물 자체도 교회였다고 한다. 여기에 들르면 즉석사진을 찍어서 벽에 붙여놓는다. 반가운 얼굴들이 눈에 띈다. 과자와 음료, 인터넷 서비스가 무료로 제공된다. 그레그는 나를 다정히 맞이하며 사무실 곳곳을 안내했다. 그런 뒤 교회 건물 뒤편으로 데려가 흰 장막을 치고 흑백 필름으로 또다시 나와 내 자전거의 사진을 찍었다. 그는 82년부터 23년 동안 특별한 바이크 라이더들에 한해서 흑백으로 초상 사진을 찍고 있다. 이 사진들은 국립 자전거 여행 초상 컬렉션(National Bicycle Touring Portrait Collection)에 들어간다.

나는 이 컬렉션에 포함된 약 2천 명의 라이더 대열에 들어가는 영광을 입었다. 이유는 한 가지. 내가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을 타고 미국을 횡단한 최초의 한국인으로 간주된다는 점. 물론 내가 미국을 자전거로 횡단한 최초의 한국인은 아니다.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이라는 길을 횡단하고 이 사무실에 들러서 국적을 밝힌 최초의 한국인이라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어쨌든 개인적으로는 영광이지만 한국인 전체로는 조금 창피한 일일지도 모른다. 바이크 라이더 같지도 않은 홍동지에게 그런 영광을 주다니. 아니 그것보다 한국인들이 그만큼 지금까지는 자전거 여행을 등한히 했다는 반증이라는 점에서 유쾌한 기록이 아닐 것이다.

그는 59살이다. 그러니까 30살의 나이에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을 생각해낸 건데 실제 착상은 그 몇 년 전이다. 그러니까 73년 그는 부인 준(June)과 친구 부부인 댄과 리즈 버든(Dan & Liz Burden)과 함께 알래스카 앵커리지에서 아르헨티나로 서반구 종단 여행을 하던 도중이었다. 여행을 끝내면 다음에는 뭘 할까 고민하다가 다가오는 미 건국 2백 주년을 맞이해 떼지어 미국을 자전거로 횡단하면 어떨까 하는 데 생각이 미쳤다고 한다. 그런데 미 건국 2백주년 기념위원회가 그들의 아이디어를 높이 사서 거액의 자금을 지원했고 이것을 밑천으로 해서 사무실을 구하고 지도를 그리고 선전을 하고 집단 라이딩을 조직했다.

여행 앞두고 편지…저널에 실려

그때 트레일은 자전거와 2백주년의 합성어인 바이크센테니얼 트레일(BikeCentennial Trail)이라고 불렸다. 정확히 몇 명이 참여했는지는 집계할 수 없었다고 한다. 트레일이 지나가는 마을 곳곳에서 라이더들이 뛰쳐나와 구간 구간 동참한 뒤 돌아가곤 했다고 한다. 줄잡아 4천명이 참여했고 그 중 절반이 완주를 한 것으로 추산된다.

그는 월남전에 반대한 양심적 병역 기피자였다. 병역 대신 2년간 사회봉사활동을 했다. 양심적 병역기피자를 거의 매국노로 보던 당시 사회 분위기에 비춰 볼 때 그는 앞으로 사회의 주변인물이 될 운명이었다. 직장 잡기도 어려웠고 2년제 미술학교 졸업장도 그리 화려해 보이지 않았다. 4년제 미술대학으로 진학할까 생각 중이었는데 그는 이 일을 계기로 평생 자전거와 함께 살게 된다. 4명의 공동 창시자중 오직 그만이 계속 이 일을 하고 있다. 아이디어 하나가 그를 먹여 살렸을 뿐 아니라 하고 싶은 일에 평생 매진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그는 57년 그러니까 11살부터 지금까지 48년을 자전거로 통학 또는 통근해 왔다. 집을 구할 때는 자전거로 통근할 거리를 먼저 계산했다고 한다. 서반구 종단을 기획한 것도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일이었는데 "자전거로 먼 거리를 여행할 수 있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고 싶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런데 그 자신은 정작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을 완주한 적이 없다고 말해 깜짝 놀랐다. 아니, 트레일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에게 이 고생을 시켜놓고 창시자 본인은 해보지도 않았다니…. 사이비 교주가 아닌가. 그는 76년에는 사무실을 지키느라고 못 했고 그 이후 지금까지는 협회를 만들고 트레일을 다른 곳으로 확장하느라 그렇게 오랜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어쩜 불행한 교주인지도 모른다. 이 좋은 것을 경험하지 못했으니까.

"왜 이렇게 트레일이 돌아가도록 설계했는가?"

내 질문이 따지는 것으로 들리지 않기를 바랐다. 근데 그의 대답에 맥이 다시 빠졌다.

"그 때는 76년 한 해의 행사로 여겼다. 그러니 길을 좀 돌게 만들든 큰 상관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베트남국수집 일요일이라 문닫았지만 물러설 수 없다"4800km 달려왔다" 넉살 떨자 국수에 커피까지 후한 대접 자전거의 힘이로다

그게 두 가지 이유 중 하나고, 다른 이유는 당시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서 루트를 그린 리즈 버든이 하필이면 지질학을 전공해서 미국의 다양한 지리와 지형을 보여주려고 했다는 것. 더구나 그는 몬태나 대학에 다녔다. 트레일이 여기까지 올라온 것은 그의 이력으로 보면 너무 자연스런 일이었을 것이다. 리즈가 국제정치학을 전공했다면 멕시코와 캐나다 양쪽 국경으로 다 끌고 다녔을 판이니 지질학을 전공한 것만으로 감사 드려야 하나. 어쨌든 이 트레일은 횡단용이라기보다는 국토지리답사용이다.

48년을 자전거로 한평생

그들은 해보니까 좋아서 마음을 바꿔 77년에도 똑 같은 횡단 행사를 기획했다고 그레그는 말했다. 그러나 축제는 끝이 났다. 참가자가 거의 없어서 조직이 와해될 위기를 겪었다. 유능한 CEO를 영입해 고비를 넘긴 뒤 지금은 직원 20명이 넘는 비영리단체로 성장했다.

그 동안 자전거 혁명이 확산됐을까.

"미국에서는 자전거가 아이들의 장난감으로 취급된다. 미국은 차에 미친 사회다.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을 봐도 청년들보다는 은퇴한 노인들이 많지 않은가. 젊은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지 않는다. 하지만 랜스 암스트롱이 분위기를 바꾸는 데 큰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한다."

그는 그렇게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어드벤처 사이클링 회원들의 평균 연령이 48살이다. 장년이 돼서도 자전거 타는 모습은 보기 좋지만 이 세대가 퇴장하면 뒤를 이을 세대가 보이지 않는다.

그는 한국 상황에 대해 물었다. 한국은 더 비극적이다. 근대화의 속도에 거추장스러운 자전거는 멸종의 직전까지 갔다가 이제 좀 흐름이 생기고 있다. 그는 미국 횡단이라는 단순한 아이디어가 불러일으킨 파장을 상기시키며 한국에도 그런 트레일을 만드는 데 앞장서는 게 어떠냐고 했다. 바로 그게 내 꿈이다. 한국은 땅덩어리가 작으니 한반도의 해변을 한 바퀴 도는 판 코리아 트레일(Pan Korean Trail)을 만드는 거다. 내가 좋아하는 말. 혼자 꿈꾸면 몽상이지만 같이 꿈을 꾸면 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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