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화속 사절 틀림없는 고구려인이다

2006. 2. 27.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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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1300여년전 고구려, 수·당 협공하려고 서역과 손잡아

타슈켄트 공항을 이륙한 비행기가 고도를 잡자마자 시르다리아강이 한 오리 실처럼 발 아래서 사막 한가운데를 남북으로 가로 지른다. 천산 산맥에서 발원해 아랄 해로 들어가는 2800여km의 장강이다. 강 건너 서남 방향으로는 오아시스 육로가 항로와 가즈런히 뻗어간다. 점점이 찍혀있는 오아시스에는 면화와 과일 나무가 듬성듬성하다. 어느새 40분도 채 안걸려 사마르칸드 공항에 착륙했다.

새 깃 모양 조우관 쓴 2명에 눈길

공항에서 직행한 곳은 사마르칸드 고고학연구소다. 어제 타슈켄트에서 소장에게 전화로 연락했지만, 토요일(7월 30일)이라 출근했을지는 좀 의심스러웠다. 고맙게도 압둘 하미드 소장과 학예연구사 등 몇 분은 2층 소장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60대 초반의 학자풍 소장은 연구소 산하 박물관에 소장된 유물들을 중심으로 발굴작업들을 간명하게 소개했다. 미진했던 이슬람 시대 이전의 유물발굴에 주력하고 있으며, 적지 않은 성과를 얻었음을 알 수 있었다. 1970년 개관한 1층 박물관에는 구석기 시대 석기류를 비롯해 시대별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눈길 끄는 것은 헬레니즘 시대의 각종 토기와 4세기께 로만글라스 유물이다. 로만글라스는 경주 일원에서 출토된 후기 로만글라스와 매우 비슷하다. 따라서 오아시스 육로의 요충지인 이곳을 통해 고대 유리 용품들을 교류했을 가능성이 높다.

박물관을 대충 둘러보고 나서 아프라시압 유적지로 향했다. 15분쯤 달리니 나지막한 아프라시압 언덕이 나타난다. 사마르칸드시 중심에서 동북방향으로 10km 떨어진 이 언덕은 기원전 6세기부터 13세기 전반 몽골군이 공략할 때까지 사마르칸드 중심부였다. 1880년대 러시아 고고학자들의 발굴로 여기에 높은 성벽으로 에워싸인 궁전과 지하수로망을 갖춘 주택들의 자취가 확인되었다. 이 고대 도시유지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언덕 들머리의 아프라시압 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단연 궁전벽화에 그려진 고구려 사절도다. 사실 이곳에 온 첫째 목적이 바로 그 벽화와 출토지의 현장 확인이다. 우선 벽화 전시실을 갔다. 이 박물관장도 겸한 하미드 소장은 아프라시압 발굴에 직접 참여했으며, 관련 연구서도 저술한 전문가로 설명이 명쾌했다. 몇 가지는 처음 듣는 내용이어서 주의 깊게 들었다.

1965년 아프라시압 도성 내성유지 23호의 발굴지점 1호실 서벽에서 7세기 후반 사마르칸드 왕 와르후만을 만난 12명의 외국 사절단 행렬이 그려진 채색벽화가 발견되었다. 이 벽화는 이듬해에 공개되어 학계의 주목을 끌었다. 그 벽화가 지금 박물관에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100여평 되는 전시실에는 높이 2m가 넘는 벽화가 좌·중·우 3면에 걸렸다. 40년 세월 속에 벽화는 많이 퇴색되어 어떤 것은 거의 알아볼 수 없었다. 안타깝지만 막을 방법이 없다고 소장은 하소연한다. 왼쪽 벽면은 우즈베키스탄 남부에서 시집오는 결혼행렬인데, 신부는 하얀 코끼리 등 위에 올라타고, 말을 탄 시녀들이 에워싸고 있으며, 그 뒤를 낙타와 말 탄 행렬이 따르고 있다.

650년께 서역과 교류는 고구려밖에

전시실 가운데 벽면에 외국 사절단 행렬도가 있다. 행렬 마지막에 서있는 두 사람이 외형과 복식, 패용물 등으로 미루어 고대 한국인 사절이며, 이 사절도가 당시 한반도-서역 사이의 공식관계를 시사해준다는 데 대해 국내외 학계가 견해를 같이 한다. 하미드 소장도 첫 정식 발굴보고서인 <아프라시압 벽화>(1975)의 저자 알리바움의 견해를 인용하면서 이의가 없다고 한다. 우선, 지금은 분간하기 어려우나 발굴 당시 이들이 인종적으로 검은 머리칼에 밝은 갈색 얼굴을 하고 있었던 점으로 보아 몽골인종임에 틀림 없다. 복식을 살펴보면 상투머리에 모자 쓰고 새 깃을 꽂은 이른바 '조우관(鳥羽冠)'을 쓰고 있다. 무릎을 가릴 정도의 긴 황색상의에 허리에 검은 색 띠를 두르고, 헐렁한 바지에 끝이 뾰죽한 신발을 신고 양손은 팔장을 끼고 있다. 이런 복식은 당시 국내외 고분벽화에 나타난 고대 한국인들의 복식과 일치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찬 큰 칼은 당시 한반도 삼국, 특히 고구려인들이 패용하던 둥근고리큰칼(환두대도)과 같은 모양이다. 머리가 둥그스럼하고 칼콧등이 크며 칼집에 M자형 장식이 있는 특징도 일치한다.

이러한 점으로 미뤄 벽화 속 두 사람이 한반도에서 온 사절임에는 틀림 없으나, 어느나라 사절인지, 즉 신라인지 고구려인지는 의견이 엇갈린다. 하미드 소장도 해답은 당사자인 우리에게 맡긴다고 했다. 문제를 푸는 열쇠는 사절의 파견 시기가 고구려 멸망 전인가 뒤인가 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그 답은 벽화 자체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이때까지 논자들은 이점을 소홀히 해 신빙성이 결여된 추단에 머물고 말았다. 이 벽화의 가장 왼쪽에는 머리가 잘려나간 한 인물이 걸친 외포 자락이 보인다. 여기에 세로로 16행의 소그드어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곳 전시실 벽화에 남아있는 이 명문은 이미 심하게 닳아 알아볼 수 없었다. 다행히 이튿날 참관한 사마르칸드 역사박물관에 또렷한 원문이 전사되어 내용을 알아볼 수 있었다. 와르후만 왕이 인근 나라 축하사절과 대화하는 내용이었다. 와르후만은 중국 당대의 영휘 연간(650~650)에 강거(康居: 사마르칸드) 도독으로 책봉된 불호만(拂呼?)이므로 사절단 방문시기는 그의 재위시인 7세기 후반기의 초엽(650~655년)이다. 이 때는 고구려가 건재한 시기다.

이런 유물과 더불어 당시 고구려와 서돌궐을 비롯한 서역 제국간의 접촉과정을 살펴보면 고구려 사절의 사마르칸드 사행을 더욱 설득력 있게 긍정할 수 있다. 고구려와 서역 제국은 다같이 인접한 중국으로부터 부단한 침공을 받아 항시 위협 속에서 동병상련의 처지에 놓여 있었다. 7세기에 접어들면서 위협은 가중되었다. 고구려는 서돌궐을 비롯한 서역 제국과 손잡고 수·당을 동서에서 협공할 목적으로 그들과의 교섭을 꾸준히 진행했다. 고구려는 5세기 전반 평양에 천도한 뒤부터 북방 수비를 위해 후위(後魏)와 친교하면서 서역과 통교를 시작했다. 7세기 초 고구려는 수나라에 대한 공동대항책을 찾기위해 중원의 오르도스 지방에 웅거하던 돌궐 추장 계민가한(啓民可汗)에게 사신을 보냈다. 당나라 초기에도 고구려는 밀려드는 당의 침략을 맞아 자구책의 하나로 당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밀려간 서돌궐에 사절을 보냈을 것이다. 아프라시압 벽화의 고구려 사절도가 바로 그것을 시사해준다.

벽화 바랬지만 대외기상 전해오는듯

고구려 외의 신라나 백제, 통일신라가 아프라시압 벽화의 사절도가 그려진 7세기 후반기 초엽에 서역과 교류했다는 사실은 아직껏 드러나지 않고 있다. 게다가 전술한 바와 같이 두 사절의 복식이나 패물이 고구려의 것과 더 가깝고, 실제로 그러한 유사품이 고구려 유지나 고구려 사절과 관련된 중국 유적에서 다수 출토되었다. 이런 사실들을 감안할 때, 벽화의 두 주인공은 다름아닌 고구려의 사절로 판단된다.

전시실 오른쪽 벽면에는 의상으로 보아 틀림없는 중국 공주가 배 타고 노니는 모습도 그려졌다. 가운데 벽면에 있는 왕 바로 앞에 중국 사절을 배치한 구도 등을 감안할 때, 당시 신속(臣屬)관계의 강국에 대한 당나라의 영향력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이상 세 폭의 벽화가 그려져 있는 방은 한 고관의 저택이라는 설도 있으나, 본궁에서 동쪽으로 약 500m 떨어진 왕의 별궁이라는 설이 더 유력하다고 소장은 소개했다. 특별전시실을 보고나서 몇 개 전시실을 더 둘러봤다. 주로 몽골침략군이 폐허로 만든 이곳 아프라시압 유지의 출토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참관을 마치고 동북쪽으로 약 15분 걸어 벽화가 발견된 현장을 찾았다. 40도가 넘는 불볕 더위에 하미드 소장은 손수건으로 머리를 가린 채 현장을 안내했다. 발굴지는 보전을 위해 흙으로 묻어버렸다. 4~ 높이의 흙더미 위에 올라서니 성터가 한눈에 들어온다. 628년 이곳을 지난 당나라 고승 현장이 <대당서역기>에 남긴 글을 보면 도성 둘레는 20여리나 되며 성내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비록 세월이 흘러 색은 바랬지만, 아프라시압 궁전의 벽화 사절도는 1300여년 전 첫 한국(고구려) 사절이 중앙아시아에 갔었음을 오롯하게 말해주고 있다. 사절의 교환은 나라의 당당한 국제성을 뜻하며, 국제성은 나라의 정체성과 자주성을 가늠하는 시금석이다. '뵈클리'(돌궐어)로 불리운 고구려는 국제성을 지닌 자주적 국가였음을 벽화는 여실히 증언하고 있다.

정수일 문명사 연구가·사진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둔황 석굴벽화에도 한국인

조우관형 모자, 긴 저고리…당대 한국인 전형적 모습 그려

아프라시압 벽화를 비롯한 서역 유적의 벽화에는 한반도에서 온 고대 사절들이 보이는 경우가 종종 나온다. 흥미로운 건 모두 새 깃을 꽂은 조우관형 모자를 쓰고 통넓고 긴 저고리를 입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런 복식의 기원을 둘러싸고 동시대 삼국 가운데 어느나라 사람이냐는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아프라시압 벽화의 경우 최근 발견된 소그드어 명문의 해석을 빌어 고구려 사절이란 견해가 더욱 우세해졌지만, 이전까지 신라인이나 통일신라, 혹은 발해인 여부를 둘러싼 논란이 이어졌다. 신라나 통일신라는 당과 발해에 의해 서역행 육로가 막혀있었기 때문에 벽화의 주인공일 개연성은 희박하다는 중론이다. 하지만 발해는 사정이 다르다. 발해의 강역인 러시아 연해주에서 8세기 중앙아시아 상업민족 소그드인들의 은화와 서역유물들이 출토된 바 있어 발해인 사절이 돌궐 등 중앙아시아 유목 제국에 파견되었을 가능성은 높다.

서역의 들머리인 둔황의 석굴벽화에서도 한반도에서 온 사절들의 모습은 간간이 발견된다. 특히 220굴 동벽의 <유마경변상도>에 그려진 고대 한국인 사절은 중앙아시아 벽화에 등장하는 최초의 한국인이다. 335굴 북벽의 유마상 주위에도 고대 한국인 사절 2명이 설법을 듣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들의 모습은 가장 전형적인 고대 한국인 사절의 상으로 평가되는 중국 장안의 장회태자 이현묘 벽화의 이미지와 닮아있다. 모두 문수보살과 유마거사의 담론장 주위에서 설법을 듣는 청중 속에 묘사된다. 상당수 학자들은 이들이 쓴 조우관 모자가 고구려의 절풍건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고구려인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신라와 당의 긴밀한 외교관계를 유지했고, 조우관의 깃털 유물이 신라 고분에서도 출토된 바 있어 신라 순례자나 사절임을 주장하는 견해도 만만치않다. 또 6세기 중국 남조 양나라를 찾아온 변방 외교사절을 그린 양직공도를 보면 백제 외교사절들도 거의 비슷한 복식을 하고 있어 논의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품이 헐렁한 소매의 긴 저고리와 바지, 조우관은 당시 한반도 외교사절들을 대표하는 복식 형태였으며 이를 당대 한국인들의 전형적 형상으로 확대해 그렸을 것이란 추측도 나온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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