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여동생' 문근영 보기 부끄럽다

입력 2005. 12. 7. 11:24 수정 2005. 12. 7.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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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당 기자]

▲ 보수단체 회원들에 의해 훼손된 파주 보광사 경내의 '통일애국투사묘역 연화공원' 안내석.
ⓒ2005 김준회

'애국단체'임을 자칭하는 반북·보수단체 회원들이 또 다른 '애국열사'들의 묘비를 쇠망치로 부쉈다. 그리고 묘역의 안내석을 붉은색 물감으로 덧칠했다. 백주대낮에 일어난 백색테러이다.

<오마이뉴스>와 <민중의소리> 보도에 따르면, 이른바 '대한민국 HID(북파공작) 특수임무청년동지회'와 '대한민국 애국청년동지회' 등 반북·보수단체 회원들과 경기도 파주 지역 노인회 등 지역 주민 130여 명은 5일 오전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보광사에 몰려가 경내에 조성된 '통일애국투사묘역 연화공원'을 훼손했다.

'연화공원'은 지난 5월 실천불교전국승가회와 파주 보광사(일문 스님)가 조성한 비전향 장기수 공동묘역이다. 조성 당시 일문 스님은 "사상 동조 여부를 떠나 우리 사회가 이제는 한국 현대사 속에서 희생된 이분들을 포용할 여건이 됐다고 생각한다"며 "공동묘역 마련은 불교 자비사상의 표현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자비'가 통하지 않았다. HID 회원들은 경찰의 엉성한 저지를 뚫고 들어가 순식간에 쇠망치로 무자비하게 비석을 파손했다. 일부 회원들은 해머로 묘비를 부순 데 이어 미리 준비해간 붉은 색 스프레이로 묘역 안내석에 '반역들의 무덤'이라고 썼다.

북파공작원들의 남파공작원 습격 사건

▲ 보수단체 회원들이 휘두른 쇠망치에 의해 부서진 류낙진씨의 묘비석.
ⓒ2005 오마이뉴스

이 과정에서 지난 4월 1일 사망한 빨치산 출신의 통일운동가 류낙진 옹의 묘비는 세 동강이 난 채 흰색 유골함이 그대로 드러나기도 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금재성·손윤규·정대철·정순덕·최남규씨 등 다른 빨치산 혹은 남파공작원 출신 망자(亡者)의 비석들도 훼손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묘비를 부순 이들은 "간첩·빨치산이 의사·열사가 웬말이나" "남파공작원은 영웅이고 북파공작원은 역적이냐" 등의 글귀가 적힌 플래카드를 묘역에 내걸었다고 한다. 이들이 내건 흑백논리의 구호가 상징하듯, 이 백주의 테러는 '북파공작원들의 남파공작원 습격 사건'이다.

이날 묘역을 파헤친 '대한민국 애국청년동지회'는 성명을 통해 "우리 대한민국이 건재한 이상 이 나라를 파괴하기 위해 활동하고 그 사상적 전향을 거부한 이들에게 '통일열사', '의사', '지사'라고 운운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며 "따라서 우리는 이들에 대한 부적절한 묘비를 모두 철거하고자 한다"고 '거사'의 취지를 자랑스레 밝혔다.

성명은 또 "이들은 북한 김정일에 속아서 세뇌되고 교육, 훈련된 사람들로서 자신들의 행동이 민족통일과 조국의 장래를 위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오판하며 속아온 사람들에 지나지 않는다"며 "따라서 우리는 대신 새로운 묘비로 '조국분단의 희생자, 비전향 장기수의 묘'의 문구가 써진 묘비를 준비했다"고 밝혔다.

이런 행위에 대해 일부 보수언론은 "비록 '적'들이지만 '조국분단의 희생자'라는 호칭을 붙여줌으로서 고인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와 측은지심을 베푼 대목으로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라고 미화하기도 했다. 사실 북파공작원들의 처지에서 보면 남한 땅에 모셔진 남파공작원들의 존재는 '자기부정'이나 같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들의 행동을 전혀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남파공작원들이 당(黨)의 소환을 받아 조국통일 전선에 투입된 것처럼, 나라의 부름을 받아 모진 훈련을 받고 적진에 뛰어들었지만 정부로부터 존재 자체를 부정당해온 북파공작원들 또한 '조국분단의 희생자'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남파'와 '북파'라는 지향이 서로 다를 뿐, 이들은 둘 다 이념과 국가주의의 희생자들인 것이다.

산 자들의 망자 습격 사건

▲ 훼손되기 전의 파주 보광사 '연화공원' 묘비석들.
ⓒ2005 이민우

이들은 또한 서로 정규군이 아닌 '게릴라'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 점에서 서로 가는 길과 방향이 달라 전선(戰線)에서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는 '북파'들이 '남파'들에게 동병상련은커녕 증오감을 표출한 것은 역설적이다.

더구나 상대는 이미 죽은 자들이다. 그점에서 이 백주의 테러는 '산 자들의 망자 습격 사건'이다. 살아 움직이는 자들이 죽어 누워있는 자들을 깨워 다시 죽인 것이다. 그래서 더 비겁하다. 도대체 무엇이 두려운 것일까.

남북 체제대결의 희생양인 그들을 안장하고 그 묘비명에 그들의 수십 년 옥살이를 지탱해온 필생의 신념을 조탁해 놓는다고 해서 대한민국이 무너지지는 않는다. 수십 년 옥살이로 병약해진 이들은 이미 출소할 때부터 대한민국을 위태롭게 하기에는 너무 늙고 병들었으며 그들의 신념은 존중될망정 신세대들이 따르기에는 너무 진부하고 고루한 것이었다. 더구나 그들은 이미 망자가 아니던가.

더욱이 오늘의 남북관계는 2000년 6·15 공동선언에서 합의했듯이, 남과 북은 평화통일 1단계의 길로 들어섰다. 지난 8·15 때는 북한 대표단이 분단 이후 처음으로 국립현충원을 찾아 고개를 숙이기도 했다.

평화(平和)는 한자 문자 그대로 쌀(禾)을 고루 나눠(平) 먹는(口) 것이다. 평화는 가족이나 이웃끼리 쌀을 고루 나눠먹어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결국 평화통일은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고 함께 쌀을 나누는 데서 출발한다.

이 '산 자들의 망자 습격 사건'은 친북·진보단체 회원들의 맥아더 동상 철거 시도와 강정구 교수 파문이 불러온 측면이 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일종의 '맞불작전'인 셈이다.

그래서 어지럽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동족상잔과 양민학살의 장면들처럼, 역사의 시계바퀴가 55년 전으로 돌아가 6·25 한국전쟁을 다시 보는 듯한 느낌이다. 영화 <웰컴투 동막골>의 동막골은 영화 속의 환상일 뿐 현실은 여전히 '동족상잔'의 연속인 것이다.

조선일보와 한나라당의 '짜고 친 고스톱' 아니면 이심전심?

문제는 동병상련과 희생의 상처를 보듬기는커녕 이들의 뒤에서 증오를 부추기는 일부 언론과 정치권이다. 마치 이들은 서로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호흡이 척척 잘 맞는다. 아니면 이심전심(以心傳心)일까? 이번에도 <조선일보>가 운(韻)을 뗐다.

<조선일보>는 2일 '대한민국 안의 '애국열사릉'을 아십니까'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대한민국 체제를 무너뜨리는 데 평생을 바쳤던 남파공작원과 빨치산 출신 비전향 장기수들을 '통일애국투사'로 기리는 추모 묘역이 서울에서 30㎞쯤 떨어진 경기도 파주시 보광사에 만들어져 있다는 소식에 우리는 할 말을 잊는다"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지척에 이런 곳이 있다"고 썼다.

이 신문은 또 비전향장기수 묘역을 북한의 '평양 애국열사릉'과 비교하면서 "남과 북이 대한민국 체제를 공산화시키기 위해 신명을 바쳤던 간첩과 빨치산을 '열사'와 '영웅'으로 함께 받들어 모시고 있는 것"이라며 "대한민국의 법은 돌아보지도 않고 김일성과 김정일의 전사들을 추모하는 묘역을 대한민국 안에 만들었다면 서울 한복판에 주체사상탑이 세워지는 날도 그리 멀지는 않을 것 같다"고 개탄했다.

그러자 한나라당은 이날 오전에 열린 주요당직자회의에서 이 문제를 집중 거론했다.

서병수 정책위원장은 "경기도 파주시 보광사 입구에 있는 간첩, 빨치산 출신자의 묘비문에 통일애국투사, 열사, 의사 등으로 미화시킨 문구들이 버젓이 나돌고 있다"면서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전복하려 한 간첩과 빨치산이 그렇게 미화되었음에도 정부가 지난 6개월 동안 알지 못했거나, 알고도 방치했다면 그것은 정부의 중대한 직무유기라는 것을 지적한다"고 경고했다.

서 위원장은 이어 "노무현 정부 들어서 불거진 맥아더장군동상 철거논쟁이나 남한체제 전복세력들을 애국자와 열사로 만드는 체제의 부조리를 국민들은 엄중히 심판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강재섭 원내대표 또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부인하는 것이고, 순국선열에게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면서 "당내 특위에서 현장 조사를 통해 어떻게 이들이 열사와 애국투사로 둔갑했는지 확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005년판 활극 <쇠망치 휘두르며>는 <조선>·한나라당·HID 3위일체작

▲ 영화배우 문근영씨.(자료사진)
ⓒ2004 안현주

그러자 조선일보는 3일자에서 다시 '의사라는 비전향 장기수 묘역 6명 살펴보니' 제목의 기사를 통해 이들이 6·25 때 빨치산으로 참전해 지리산 토벌대와 교전한 사실 등을 부각시켰다. 그런 뒤에 5일 묘역 훼손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결국 1950년대 반공영화를 리메이크한 2005년판 활극 <쇠망치 휘두르며>는 조선일보의 기획, 한나라당의 연출, HID 출연의 3위일체작인 셈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활극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류낙진씨는 '대한민국 국민 여동생'으로 통하는 영화배우 문근영양(18)의 외조부이다.

류씨는 20세에 남로당에 입당해 한국전쟁 당시 지리산 일대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57년 출옥한 뒤에 문양의 외조모인 신애덕씨(73)와 결혼, 전남 보성의 예당중 교사로 재직하다가 71년 통혁당 사건으로 구속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류씨는 88년 6공 시절에 20년형으로 감형된 뒤 90년에 전향서를 쓰고 19년 만에 가석방됐다. 하지만 그는 김영삼 정부 시절인 94년 '구국전위' 사건으로 구속되어 다시 8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류씨는 광주지역 재야인사들의 석방운동의 결과로 99년 광복절 특사로 비전향 가석방되어 광주에서 재야활동과 서예를 하며 지내오다가 지난 4월 1일 사망했다.

문근영양의 가족들은 류씨의 장례 때 들어온 부의금 5000만 원을 통일운동에 써달라며 범민련 남측본부에 기탁했다. 문양은 평소 수입의 상당 부분을 자선단체나 교육 관련 기관에 기부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문양은 지난해에도 CF 출연료 3억 원 전액을 사회복지기금으로 내놓았고, 광주지역의 학생들을 위한 '빛고을 장학기금'으로 네 차례에 걸쳐 1억 원을 기부했다.

이런 문양에 대해 영화계에서는 "항상 예의바르고 심성이 고와서 가정교육을 잘 받았다는 느낌을 받는데, 교육계에 계시는 부모님과 촬영장에 늘 함께 다니는 외할머니로부터 좋은 영향을 받은 거 같다"고 말한다. 외조모 신씨는 류씨가 장기수일 때 시장 행상과 보험 외판으로 두 명의 시동생과 4남매를 훌륭하게 키운 것으로 알려졌다.

문양은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배우 문근영의 이미지로 할아버지의 이미지를 훼손시키고 싶지 않아요"라면서 "그냥 외할아버지의 손녀 문근영으로 남았으면 좋겠어요"라고 답한 적이 있다.

왜 우리들 마음 속에는 그들이 죽어 누울 땅 한 평 내줄 여유조차 없는 것일까.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국민 여동생' 문근영 보기가 부끄럽다.

/김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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