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헌규 특파원의 今日中國]政街에 부는 자유·민주화 바람

2005. 11. 21.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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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자`후야오방 90돌 기념식 지도부 참석…"정치 변화 신호탄"

[베이징=최헌규 특파원] 후야오방(胡耀邦)에 대한 재조명과 경제학자의 공신력 위기가 요즘 중국 정가에 풍파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후 전 총서기 기념식은 정치 자유화의 시험대라는 관점에서, 경제학자에 대한 대중의 불신은 이 문제가 정부 및 체제 불만의 표출이라는 점에서 각기 주목을 끌고 있다.

중국 공산당은 원자바오(溫家寶), 쩡칭훙(曾慶紅), 우관정(吳官正) 등 정치국 상무위원 다수가 참석한 가운데 지난 18일 후야오방 탄생 90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또 사후 처음으로 `후야오방 전기`가 출판돼 20일부터 신화(新華)서점을 통해 판매되기 시작했다. 고향인 후난(湖南)성과 묘소가 있는 장시(江西)성에서도 19일과 20일 잇따라 기념식이 치러졌다. 후는 한순간에 `큰 족적을 남긴 불멸의 공산주의 전사`로 부활했다.

생전에 후는 부르주아 자유주의자였다. 젓가락보다는 포크를 사용하자고 했으며 알베르 카뮈의 작품을 지식인들에게 소개하거나 티베트 문제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가 총서기 재직 때인 지난 86년 말과 87년 초 중국은 경제과열로 혼란에 빠졌고 민주화 시위가 빈발했다. 덩샤오핑(鄧小平)이 시위진압을 지시했으나 후는 미온적으로 대응했다. 후는 87년 1월 총서기에서 해임되고 89년 4월 심장발작으로 사망했다. 해임 번복과 엄중한 장례식을 요구하는 시위가 격화됐고 끝내는 톈안먼(天安門) 사태로 이어졌다. 이 때문에 톈안먼 시위는 후의 망령이 주도했다는 말이 나왔다.

이렇듯 톈안먼 사태와 맞물린 후의 이번 추도식을 놓고 일각에서는 정치기류 변화의 신호탄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톈안먼 사태 재평가의 사전 정지작업인 동시에 잠재된 정치자유화 및 민주화 요구에 부응하려는 현 지도부의 정치적 제스처라는 분석이다.

이와 관련, 정부정책에 대한 대중의 불만표시가 또 하나 있다. 최근 경제학자들에게 쏟아지는 대중의 비난이 그것이다. 이는 정부정책뿐 아니라 암묵적으로는 체제개편까지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부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홍콩의 딩쉐량(丁學良) 교수는 지난달 말 중국 학계에 진정한 경제학자는 5명을 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여론조사결과 83%가 딩 교수의 견해를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 경제학자들`이 대부분 기관과 공립대학, 사회과학원 소속 관변 이론가들임을 감안할 때 대중여론은 결국 정부정책을 직접 겨냥한 셈이다.

대중들은 학자들이 개혁ㆍ개방에 힘을 보태고 성장에 기여했는지는 몰라도 정부선전과 이익집단의 옹호에 급급했고 결과적으로 빈부격차만 확대시켰다며 불만을 터뜨린다. 이런저런 이유로 정치ㆍ사회 변화요구가 거세지면서 중국의 체제개편 작업도 가속화할 것으로 예고된다.

(k@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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