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원 칼럼]친일집안의 어제와 오늘

2005. 9. 4.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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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광복 60주년을 맞이하여 친일파 1차 명단을 발표했다. 당연히 와글와글 말이 많을 수밖에 없다. 힘없는 사람은 수천 사람이 떠들어도 여론이 안 되지만 '글과 말로 힘 있는 곳' 세 곳만 합치면 바로 국민적 여론이 된다.

흔히들 우리나라 메이저 신문의 전 사주와 전 회장, 창업자가 친일파 1차 명단에 포함되었다. 당연히 시비가 일지 않을 수 없다. 명단에 든 사람들의 행적 조사가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이 나라에서 입으로 가장 힘 있는 언론사 세 곳이 회사 전체의 힘을 결집시켜 그 명단이 공정하지 않다고 시비를 걸고 나오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건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다. 이태 전인 2003년 말, 일본 국회도 아니고 대한민국 국회에서 당시 다수당의 우격으로 친일진상규명 특별법 제정이 보류되고 친일인명사전 편찬 비용이 전액 삭감된 일도 있었다. 그때에도 이유는 딱 하나였다. 그 사업을 계속하면 자기 선친의 친일행적이 공개되거나, 자기들의 우군이 곤경에 처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국회의 다수당이 예산 삭감을 결정하자, 즉각 국민들이 나서서 사전 편찬을 위한 성금을 모았다.

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60년이 지났는데도 친일 청산은커녕 친일파 명단 작성조차 일제시대의 독립운동처럼 나랏돈보다 분노한 국민들의 성금으로 그 일을 먼저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 한편에서는 친일파 후손들이 제 조상들이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일제로부터 받은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끊임없이 국가를 상대로 재판을 벌여왔다.

하기야 내 고향에도 어른들의 말을 들으면 친일로 날이 새고, 친일로 밤을 맞이했던 집이 있었다. 우리 어린 시절 어쩌다 시내에 나가 한길 바깥에서 담장을 한참 따라 걸으며 구경하게 되는 그 집은 보통 집의 백 배 이상 규모의 터전 위에 세워진 대저택이었다. 그러나 그때엔 그냥 시내의 돈 많은 집 정도로만 알았다.

중학교 때 그 돈 많은 할아버지가 죽었는데, 그의 영결식은 강릉에서 가장 큰 광장에서 치러졌다. 그가 우리 학교의 재단이사장이어서 어린 우리도 그 영결식에 참석했다. 집안 어른들과 동네의 어른들은 그가 지역에서 첫손 가는 친일파였다는데, 시장을 비롯해 지역사회에서 제법 말발이나 하는 사람들 모두 단상에 올라가 그의 공적을 칭송하기에 바빴다.

영결식장 제일 앞줄에 우리 학교 학생들이 섰고, 키가 작은 나는 더욱 앞에 서서 우리 시의 기관장들과 유지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말을 들었다. 그 중엔 그가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도 모르게 독립자금을 댔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말을 들으며 우리는 옆 자리의 친구와 "아무도 모른다면서 어떻게 알아?" 하는 말을 했다. 그래, 그것은 그 사람이 지어낸 얘기 그대로 그가 '아무도 모르게 한 일'이다.

그러나 그가 세상사람 모두 알게 한 일은 일제 때 도의회 의원을 거쳐 조선총독부 자문기관인 중추원 참의를 지내기도 하고, 중일전쟁이 일어났을 때 회갑잔치를 하지 않고, 당시 1000원이 얼마만큼의 큰돈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돈 1000원을 국방헌금으로 내 이게 신문에도 크게 나고 일본 왕실로부터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고 했다.

후일 그의 아들이 국회의원에 출마했다. 잠시 부친의 이력이 문제 되었으나 돈의 힘과 선대의 친일을 아들에게 책임 묻는 것이 아니라는 지역주민의 밝은 온정 속에 그는 국회의원이 되어 2003년 말 친일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을 보류시켰고, 친일인명사전 편찬 비용 전액을 삭감했다. 그리고 그러기에 앞서 2002년 대통령 선거 때 선거자금 불법모금에 앞장섰으며, 그 일로 감옥에 갔고, 얼마 후 감옥에서 풀려나고 또 복권되었다.

내가 고향의 한 집안을 통해서 보아온 친일의 어제와 오늘은 그렇다. 아버지는 친일하여 힘을 얻고, 그 힘을 세습한 후손들은 그런 아버지의 얼룩을 감추기 위해 또 한 번 역사를 왜곡한다. 슬프게도 지금 우리의 모습이 그렇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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