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이냐, 공산당이냐

2005. 8. 5.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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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1955년 봄 수천명의 조선인 일본공산당원들이 탈당을 감행하기까지 놀라운 대중동원력과 투쟁력 보여줬지만 내면의 상처 수습하지 못해 ▣ 도쿄=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조선인을 그만둘 텐가, 공산당을 그만둘 텐가?" 1955년 어느 날, 일본 공산당에서 활동하던 고사명(73)씨는 조직 윗선으로부터 선택을 요구받았다.

변변한 생계수단도 없이 공산당 지하조직에서 '전임 연락책'으로 일하던 그에겐 너무도 어려운 결정이었다.

하룻밤을 몸져누워 고민한 끝에 그는 당을 버리고 민족을 선택하기로 했다.

"우리는 항상 화염병조였다" 1955년 봄이었다.

이 질문을 마지막으로 일본 공산당 속의 화려했던 조선인들의 투쟁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수천명의 조선인 당원들은 일제히 공산당을 떠났다.

어떤 지부에서는 조선인 당원들이 전체 토의를 거쳐 '탈당 선언'을 했고, 어떤 지부에서는 고씨처럼 개인에게 개별적으로 '출당'을 통보했다.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일본 공산당에서 조선 해방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난 이때 조선인은 일본인과 '존재의 뿌리'가 다르다는 걸 깨달았지요." 어느덧 일본 사회에서 중견 작가로 성장한 그는 취재진과의 인터뷰에서 "이 사건으로 '직업적 혁명가'의 길을 버리고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며 "마르크스 원전을 다시 읽었고, 일본 사회의 경계인으로서의 삶의 궤적을 풀어놓는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고 말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1945년 해방 뒤 일본 공산당 투쟁의 주요 동력은 재일 조선인들이었다.

해방 이전까지 공산당은 비합법 상태에 있었고, 대다수 일본인 지도자들은 감옥에 있었다.

그러다 1945년 종전 뒤 이뤄진 재건 활동에는,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을 통해 조직을 추스른 조선인 당원들이 앞장섰다.

시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고씨는 "당시 대중 동원력이 있는 일본인 단체는 많지 않았기 때문에 공산당은 조선인들에게 강력하게 대중 동원을 요청했다.

그래서 조선인들은 당원을 중심으로 일반 대중을 이끌며 투쟁에 가담했다"고 말했다.

조선인 당원들은 민족학교를 설립하면서 현장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위대를 조직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투쟁 명령을 내리는 최상부는 공산당의 민족대책부였다.

재일 조선인 문제와 한국전쟁 반대를 위해 활동한 민족대책부 산하에는 비합법 조직인 조국방위위원회가 있었고, 조국방위위 산하의 조국방위대가 '선봉대' 역할을 맡고 있었다.

대원들은 대부분 조선인이었다.

1952년 일어난 일련의 노동자 파업·조선전쟁(한국전쟁) 반대 투쟁인 도쿄의 피의 메이데이 사건, 오사카의 스이타 사건, 나고야의 오스 사건은 조선인이 전면에 나선 투쟁으로 기록된다.

5월1일 도쿄 천황궁 앞 광장. 일본 노동자들은 이곳에서 해마다 노동절 행사를 치렀다.

노동자들은 천황궁 광장 바깥 뜰에서 집회를 열다가 '미국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광장으로 진입하려 했다.

갑자기 최루탄을 쏘며 곤봉을 쥔 경찰이 들이닥쳤다.

고씨는 "일본인은 허겁지겁 도망쳤지만, 조선인은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경찰과 대적했다"며 "조선인은 공산당에서 가장 용감했던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이 사건으로 2명이 숨지고 200여명의 노동자들이 구속됐다.

내정간섭이 될 수도 있다? 도쿄에 사는 김익수(가명·72)씨의 오른쪽 다리엔 화염병에 덴 화상 자국이 남아 있다.

1952년 7월 경찰의 발포로 2명이 사망한 나고야의 오스 사건 때 입은 상처다.

"조선인은 항상 화염병조였어요. 대열의 앞에서 경찰을 타격하는 게 임무였죠. 보통 뒤에는 일본인들이 섰고, 앞에서 조선인들이 화염병을 던지고 빠졌어요. 시위대열 상의 각 조직의 위치와 전술은 위에서 정해져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앞에 섰지요." 5천여명의 시위대 가운데 상당수가 조선인이었고, 선봉대 역시 김씨를 비롯한 조선인이 맡았다.

그래서 조선인들은 시위가 벌어질 때마다 부지기수로 경찰에 붙잡혔다.

체포된 조선인들 중 상당수는 오무라 수용소로 보내졌다.

이곳은 전쟁물자 수송반대 투쟁이나 군수공장에서의 파업 등 반전·공산주의 운동을 벌인 재일 조선인과 현해탄을 건너온 불법 입국자들을 가뒀다가 강제 송환하는 조선인 전문 수용소였다.

이 시위들은 모두 공산당 중앙에서 지시가 하달돼 공장·대학·조선인 학교 등 각 대중조직의 세포가 움직여서 실행됐다.

특히 1951년 공산당이 군사노선으로 전환한 뒤, 당시 이슈였던 조선전쟁에 대한 대응은 기본적으로 일본의 전쟁 보급선을 차단하는 폭력투쟁이었다.

시위 때마다 화염병은 기본이었고, '영양분석표'라는 가짜 표지가 씌워진 폭탄제조 교과서가 배포돼 군수공장에 폭탄이 투척되기도 했다.

하지만 1952년을 정점으로 하는 일련의 조선인과 공산당의 투쟁은 당 공식 역사에서 누락됐다.

2003년 1월 공산당 중앙상임위가 펴낸 공식 역사서인 일본 공산당의 80년>에는 조선인들의 화려한 투쟁 경력도, 침묵 속의 집단 탈당도 기록돼 있지 않다.

1950년대 초 이뤄진 가장 강력한 반전·반미 투쟁은 건너뛰고 중국·소련과 연계된 당내 분파들의 투쟁을 다룬 이른바 '1950년 문제'에만 40여쪽을 할애하고 있을 뿐이다.

이에 대한 공산당의 설명은 조선인이 '외국인'이라는 것이다.

'조선 혁명을 위한 운동'이었지, 일본 공산주의 운동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한겨레21>이 만난 요시오카 요시노리(75) 전 공산당 의원도 △조선인은 외국인이기 때문에 일본 공산주의 운동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점 △이는 내정간섭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이유로 들어 설명했다.

일본의 역사학자 가지무라 히데키는 1980년 펴낸 재일 조선인 운동>에서 일본 공산당이 버린 공백의 역사는 조선인 공산당원의 내면에 상처를 입혔다고 말한다.

"한편으로는 형식상 일본 공산당의 조직 아래 있고, 한편으로는 점차 공화국과의 관계가 긴밀해지는 가운데, 기존의 노선으로 악전고투해온 조선인 당원의 내면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특히 조련·민전의 중추에서 역할을 다해온 사람은 조선전쟁 종료 뒤에 선택의 기로에 섰던 경험을 지금까지 말없이 가슴에 안고 남에게 알리지 않고 있습니다.

"

그들은 왜 '폭도'가 되었나

일본공산당이 한국전쟁 시기 군사노선을 '극좌 모험주의'로 비판하면서… ▣ 남기정/ 국민대 국제학부 전후 재건된 일본 공산당은 일본 공산주의자들과 재일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의 합작품이었다.

1926년의 제3회 당대회 이래 실로 19년 만인 1945년 12월 일본 공산당은 미군 점령하에서 창당 이래 최초로 합법 정당으로 인정받고 제4회 당대회를 개최했는데, 여기에서 선출된 7명의 중앙위원에는 '재일 조선인의 별' 김천해가 도쿠다 규이치 등과 함께 포함돼 있었으며, 송성철이 7명의 중앙위원 후보 가운데 한명으로 포함돼 있었다.

이에 앞서 1945년 10월, 일본 전국에서 출소한 공산주의자들을 열렬히 환영한 것은 다름 아닌 재일 조선인들이었다.

이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해 끝까지 투쟁했던 경험을 공유한 동지적 유대감이 자연스럽게 표현된 것이었지만, 1920년대 말 코민테른의 '일국일당' 원칙에 따라 재일 조선인 노동자들의 민족운동이 당 중심의 계급주의 속에 해소됐던 역사를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이듬해인 1946년 1월 중국 옌안에서 일본인 해방동맹을 이끌던 노사카 산조가 귀국하자, 2월에 일본 공산당은 제5회 당대회를 개최했는데, 여기에서도 김천해는 20명의 중앙위원 가운데 하나였으며, 김두용·송성철·박은철 등이 나란히 중앙위원 후보로 선출됐다.

그 이후 재일 조선인과 일본 공산당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일본에서 계급운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관계는 일본 공산당이 '해방군'인 미 점령군과의 협조를 통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당면 과제로 설정한 단계에서도 유지됐다.

그런 의미에서 재일 조선인 운동은 점령개혁 초기의 탈군국주의 민주화 운동에서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것이 계급의 이익에 봉사하는 한, 협력 체제는 유효했다.

그런데 중국 대륙의 공산화를 계기로 미국의 대일 점령정책이 일본의 반공보루화 정책으로 급격히 선회하면서 좌익 탄압이 개시되고, 1949년 9월에 그 시범 케이스로 재일 조선인 운동의 구심이었던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이 해체되자 재일 조선인 운동과 일본 공산당 운동은 균열을 보이게 되었다.

조련이 해체된 상황에서 일본 공산당 중앙은 '조-일 양 국민의 이름으로 적 계급의 음모를 폭로하자'고 하여 투쟁의 수위를 폭로전에 두고, 미 점령당국과 정면 대결을 피하려는 인상을 주었다.

이러한 태도는 일본 공산당 내 조선인 당원회의에서도 추인됐다.

이는 계급 이익 앞에서 민족 이익을 해소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민족적 요구를 떠난 무리한 계급의식의 고취가 재일 조선인 운동의 조직화를 이루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지방 수준에서는 재일 조선인 사이에 민족의식을 강화하게 되었고, 이것이 미국의 한국전쟁 '개입' 이후, 활발히 조직화되는 재일 조선인 운동의 기저를 형성하고 있었다.

한편 1950년 1월 코민포름이 일본 공산당의 평화혁명 노선을 비판한 이후 일본 공산당은 1951년 들어 군사노선으로 급선회하는데, 군사노선의 전위에 서 있었던 것이 재일 조선인들이었다.

샌프란시코 강화조약이 발효되는 해인 1952년의 일련의 사건들, 즉 피의 메이데이 사건과 스이타 사건에서도 재일 조선인은 전위에 서 있었다.

그들에게 운동은 계급혁명인 동시에 민족해방이었던 것이다.

일본인 공산주의자들과 재일 조선인 공산주의 운동이 가까스로 연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은, 그들의 운동이 계급혁명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사노선은 실패했다.

그리고 일본 공산당은 1955년에 제6회 전국협의회를 열어 한국전쟁 시기의 군사노선을 '극좌 모험주의'로 비판하고 합법 공간으로의 재진입을 시도했다.

이에 따라 재일 조선인 운동은 전후 일본사에서 한갓 '폭도'에 지나지 않게 되었고, 나아가 공산당의 공식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이후 일본 사회에서 한편으로는 '조선인=폭도'론이 확대재생산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인 무시'론이 내재화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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