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조선인은 우리의 은인"

2005. 8. 5.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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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일본 공산당 60년사> 집필자 요시오카 요시노리 전 의원을 만나다 "북한 조선노동당에 앞서 일본이 먼저 그들의 역사를 정리하기는 힘들어" ▣ 도쿄= 글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일본 공산당 공식 역사에서 조선인들의 투쟁이 빠진 이유를 듣기 위해 도쿄 요요기의 일본 공산당 중앙당사에서 요시오카 요시노리(75) 일본 공산당 전 의원을 만났다.

요시오카는 이 자리에서 "1945년 8월 종전 뒤 일본 공산당 재건 과정에서 재일 조선인 당원들의 힘이 컸다"며 "조선인은 일본 공산당의 은인"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일본 공산당의 공식 역사에서 조선인의 활약이 제외된 이유에 대해서 "조선인 당원은 외국인이기 때문에 당사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이라며 "북한의 조선노동당에 앞서 일본이 먼저 역사를 정리하기는 힘들다"고 덧붙였다.

요시오카는 1980년대 초 공산당의 공식 역사서인 일본 공산당 60년사>를 작성했으며, 1986년부터 지난해까지 참의원을 세 차례 연임한 '거물'이다.

또한 한-일 외교사를 연구하면서 여러 저서를 펴낸 '학자 정치인'이기도 하다.

시가현 지부 76명중 조선인이 58명 한평생 공산당에서 활동하면서 재일 조선인에 대해 기억나는 게 있나. 1950년대 시가현 지부에서 일할 때 많은 교류를 했다.

시가현 지부에는 조선인들이 아주 많아서 76명의 당원 가운데 일본인은 단 18명뿐일 정도였다.

1951년이었나? 시위가 끝나고 조선인 당원인 조철수(가명)의 집에서 숨어 지내던 일이 생각난다.

그는 나에게 밥을 차려주고, 병원에 데려가 치료를 해줬다.

조형과는 형제처럼 친했다.

그는 식당과 파친코 사업으로 일본 사회에서 성공했는데, 3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 시절 조형처럼 친절하고 헌신적인 조선인들이 당에는 참 많았다.

조선인은 취직이 어려워 주로 식당이나 막노동판을 전전했지만, 당시 학생들이 대부분인 일본인 당원을 돕는 사람이 많았다.

일본인 당원들은 조선인들에 대해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형제였다.

1955년 공산당의 조선인 당원들이 집단 탈당한다.

당시 상황을 설명해달라. 그해 4월이었나, 돗토리현 지부 위원장을 할 때다.

당 중앙의 간부가 와서 "조선인 당원의 탈당 지침이 내려졌다"고 말했다.

이 지시를 당원들에게 전했고, 조선인 당원들은 곧바로 토의를 연 뒤 이를 받아들이고 탈당했다.

위로부터의 일방적인 탈당 명령에 반발하는 당원들은 없었나. 그런 반발이 드러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왜 탈당해야만 하는지를 조선인 당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이해했는지는 모르겠다.

쫓겨났다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조선인과 함께 '동지'로 일한 나로서도 '탈당해달라'고 말하기 힘들었다.

탈당 방침은 어떻게 결정됐나. 지금 추론해보면 탈당 방침은 조선노동당의 요청에 따라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1953년부터 북한의 조선노동당과 재일 조선인 조직인 민족통일전선(민전)이 이미 논의를 시작했다.

조선노동당이 일본 공산당에 요청해 1955년 탈당 명령이 떨어졌을 것이다.

조선인들의 탈당 방침이 적절했다고 생각하나. 공산당의 방침상 '해외 공민'이 내정간섭을 해서는 안 된다.

일본에서 외국인의 권리를 위해 활동할 수 있지만, 일본 혁명을 위해서 활동하는 건 안 된다는 방침이 결정됐고, 그래서 조선인이 일본 공산당을 떠난 것이다.

조선인이 먼저 평가할 문제 일본 공산당사에서 조선인 당원들의 활동 기록이 빠져 있다.

특히 피의 메이데이 사건, 스이타 사건 등 1952년의 역사적인 반전투쟁은 공산당의 지도 아래 이뤄졌는데도 이에 대한 언급이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

공산당 역사책에서는 이들의 활동을 취급하지 않고 있다.

지부 차원에서 기록한 것이 있을진 모르지만…. 나는 1980년대에 일본 공산당 60년사>를 썼다.

그때 집필위원들끼리 조선인 당원의 활동에 대해 쓸지 말지를 두고 토론이 있었다.

하지만 쓰지 않기로 했다.

왜 쓰지 않았나. 북한쪽에서 먼저 기록해야 할 문제이지, 우리가 먼저 일방적으로 기록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판단했다.

고의로 제외했다기보다는 쓸 수 없었다는 게 맞다.

조선인의 당 활동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정리하면 다른 나라를 간섭하는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재일 조선인의 다수를 이루는 '조선적'은 외국인이다.

일본에서 법적으로는, 정당이 외국인에게 돈을 받아도 불법이다.

'외 뮌�(조선인)의 내정간섭 금지'는 당연한 원칙인데, 1950년대에 그런 원칙이 없었다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조선인이기 때문에 일부러 누락시킨 것은 아닌가. 그렇게 오해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아니다.

지금이라도 공산당 차원에서 정리할 생각은 없나. 개인적으로 역사책을 쓴다면 가능하다.

재일 조선인은 일본 공산당의 은인이다.

이 사실은 아는 공산당 1세대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젊은 공산주의자들은 일본 공산당 역사 속에서 조선인이 얼마나 큰 일을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공식 당사를 기록하는 데서 북한과의 관계 등 여러 가지 문제를 무시할 수 없다.

남과 북, 일본의 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들이 모여 정리하는 건 어떨까. 남한의 경우 민주노동당이 있긴 한데, 우리와는 조직적 교류가 없다.

국가보안법 때문에 우리와 교류하면 경찰에 잡혀가는 것 아닌가? 어쨌든 그런 기회가 올 것이다.

그러나 먼저 당사자인 조선인이 역사적 평가를 내려야 한다.

'조국'이 먼저 덮어버렸다

재일 조선인들조차 일본 공산당원으로서 투쟁한 경험을 말하기 꺼리는 이유 총련에 속한 재일 조선인들조차도 일본 공산당원으로서 벌였던 투쟁 경험에 대해 말하길 꺼린다.

왜일까? 북한 정권과 총련 또한 이 시기를 덮어두고 싶은 과거로 여겨왔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이 정전으로 귀결된 뒤, 북한의 남일 외상은 재일 조선인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민'으로 규정하고 일본과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하길 원한다는 성명을 1954년과 이듬해 연이어 내놓는다.

재일 조선인은 '북한의 공민'인 이상 일본 공산당원이어서는 안 되고, 일본 정부를 겨냥한 폭력투쟁은 더는 해선 안 될 일이 됐다.

이런 노선 전환에 따라 당시 조선인 대중조직이자 투쟁조직체였던 재일통일민주전선(민전)은 해산되고, 1955년 공화국의 '해외공민 단체'인 재일본조선인총연합(총련)이 출범한다.

재일 조선인 운동 세력 속에서는 분파 투쟁이 있었다.

초대 총련 의장이었던 한덕수를 중심으로 한 한덕수파는 북한 정권과의 교감 속에서 일본 공산당과의 결별을 주장했고, 폭력투쟁을 이끌어오던 공산당 민족대책부의 민대부파는 민족해방과 일본혁명의 동시 관철을 고수했다.

한덕수는 1955년 조선인 신문인 해방신문>에 김일성 원수의 교시를 발표했고, 총련이 결성되자 민대부파는 입지를 잃게 된다.

"재일동포는 먼저 조국의 통일, 독립을 위해 미제와 이승만에 반대해야 하며 일본의 요시다 및 하토야마 타도를 주목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

…(그동안) 우리는 단지 일제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공동전선을 벌였을 뿐이다.

…우리들이 몇번이나 주의했음에도 불구하고 박헌영, 이승엽 일단은 남반부에서 혁명세력을 보존하고 결정적 시기에 결정적 역량을 발휘 못하게끔 극좌적 모험을 격발함으로써 조국해방 전쟁의 시기에 아무런 조력도 되지 못하게 해놓고 말았다.

" 김일성의 교시는 사실상 이 시기 재일 조선인들의 반전투쟁을 남로당에 빗대 '극좌 모험주의'로 규정한 것과 다름없었다.

그래서 총련의 역사에서는 일본 공산당과 마찬가지로 스이타 사건도 피의 메이데이 사건도 찾을 수 없다.

'열차 1시간을 지연시키면 동포 1천명을 살릴 수 있다'는 한마디에 수많은 조선인들이 목숨을 걸었지만, 그들의 순수한 열의는 아직도 역사의 거처를 찾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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