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희망의 문화인 ⑷] 영화감독 임필성

2005. 1. 6. 0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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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많던 문학청년들이 우르르 영화계로 몰려온 90년대,청운의 꿈을 품고 충무로로 내달려온 사람들 중엔 임필성(33)도 있었다.

1993년 독립영화협의회에서 단편영화 워크숍을 하던 시절,곁에는 훗날 ‘아라한 장풍 대작전’의 류승완도,‘살인의 추억’ 봉준호도,‘올드 보이’의 박찬욱도,‘반칙왕’의 김지운도 있었다.

그렇게 함께 한국영화의 미래를 얘기하던 세월이 훌쩍 지나가고 다들 화제작을 낳으며 성공했으니 이제는 임필성의 차례일까.송강호 유지태라는 스타를 캐스팅하고도 선뜻 투자를 하려는 이가 없어 접을 뻔 했던 영화 ‘남극일기’를 들고 2005년 그가 성큼 성큼 걸어온다.

그와 영화의 인연은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검사였던 아버지는 영화광이었다.

아버지는 경북지역 불법 비디오총판을 검거한 후 압수한 비디오 테이프를 주말이면 들고 오셨다.

초등학교 2학년이던 그는 몰래 비디오를 훔쳐 보며 영화의 세계에 빠졌다.

20대,몇편의 단편을 찍고 인정받았을 때만해도 마음은 구름 위에 떠있었으나 그의 시련은 첫 장편영화 ‘남극일기’를 기획하면서부터 몰려오기 시작했다.

99년 가을 어느 새벽,한국 남극 탐험대의 무보급 남극횡단을 보며 그는 영화적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끊임없이 낮만 계속되는 공간,하얀 눈밭과 새파란 하늘외엔 아무것도 없는 배경,고독의 행군을 하는 탐험대원들의 한계상황. 이 모티브를 잘 발전시킨다면 인간의 원형적인 욕망을 이야기하면서도 서스펜스와 호러를 극대화한 영화를 만들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첫 장편영화로는 무리라고 판단,성공하면 나중에 찍자며 다른 시나리오를 준비했다.

다음해 가을,1년 넘게 준비해오던 데뷔작이 수포로 돌아가자 다시 남극일기 시나리오 작업에 매달렸다.

그러나 제작사(봄)는 막대한 제작비가 들어가는 이 영화에 선뜻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나쁜 일은 혼자 오지 않는다고,하릴없이 시간만 흘러가던 2001년 한해만도 장모가 타계하고,아이가 휘두른 화장붓에 귀를 찔러 고막이 60%나 손상됐으며,요로결석이 생겨 응급실에 실려갔다.

미적대던 제작사에서는 휴먼스토리로 시나리오를 다시 쓰자는 제안까지 해왔다.

결국 다른 제작사(미로비전)로 옮겨 갔고,천신만고끝에 새로운 버전의 시나리오가 나왔다.

하지만 며칠후 캐스팅도 잘 될 것같고 영화도 좋을 것같지만 이 영화를 못하겠다는 최종결정이 내렸다.

“회사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제가 충무로를 잘 몰랐던거죠. 상업영화의 룰을 잘 모른채 그냥 영화만 잘 찍으면 된다고 생각했던게 문제이지요.”제작포기상태에 마지막으로 찾은 곳이 현재 제작사인 싸이더스였다.

“강호형과 지태를 캐스팅하고 차승재 대표를 스토킹하다시피해서 제작을 하게 됐죠. 당시 싸이더스도 ‘지구를 지켜라’가 망하고 거의 절망적인 상태였는데 다행히 ‘살인의 추억’이 잘되면서 다 잘 풀렸죠. 자금사정도 좋아졌고,전형적이지 않는 상업영화도 된다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캐스팅도 잘되고,든든한 제작사도 얻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선뜻 투자사가 나서지 않았다.

또 그렇게 속절없이 1년이 지났다.

“그때가 가장 힘든 시기였던 것같습니다.

이러다 못찍게 되는거 아닌가하는 생각때문이지요. 강호형 지태 (봉)준호형과 술을 마시다 다들 눈물을 흘렸지요. 영화가 진저리나게 두려워진 것도 바로 이때였습니다.

”99년 이 영화를 처음 기획할 때 태어난 딸이 올해로 7살이 된다.

그동안 제작사가 3번 바뀌었고,시나리오가 3번 수정됐으며,PD만 7번이 바뀌었다.

영화 한 편에 매달리는 동안 소득도 변변찮았으니 아내의 눈총은 얼마나 따가웠으랴. 그러나 희망은 의외의 곳에서 찾아왔다.

막상 투자를 받고 뉴질랜드로 촬영을 떠난 후에도 고생은 계속됐지만 그런 것쯤이야 이 영화가 아예 만들어지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단다.

임감독에게 2005년은 희망의 해다.

영화도 벌써 97%나 찍었고,올 상반기에 드디어 ‘임필성’이라는 이름을 걸고 관객을 찾아간다.

“도달 불능점을 향해가는 ‘남극일기’의 탐험대처럼 저도 미치듯이 행군을 계속해왔습니다.

좌표를 잃기도 하고 탈진해 포기할뻔도 했지만 멈출수가 없었지요. 이 괴물같은 영화에 숨을 쉬게 만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영화감독에게 필요한 미덕중에 가장 큰 것은 재능과 감각이 아니라 지구력인 것같다”며 “무슨 일이건 이거 안하면 평생 후회할 것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빠지면 못할 일이 뭐가 있겠냐”고 희망의 메시지를 던졌다.

한승주기자 sjh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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