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전] 천국에서 양심을 생각하다

2003. 12. 17. 0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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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국립극단을 뒤집은 초대 노조위원장이자 ‘대학로 검증 배우’…늙다리 청년 우상전 파이팅! 국립극단 공연은 일반 극단에선 쉽게 접하기 힘든 스케일이 큰 대작들을 많이한다. 게다가 제작비는 언제나 나랏돈이므로 충분한 물적 토대 위에 풍성한볼거리들이 많아서 고전 대작을 대하는 기쁨과 화려한 무대를 즐길 수 있다.

하지만 반면에 생생한 현장성이 생명인 공연예술에서만 느낄 수 있는 짜릿한관극의 경험을 한 기억보다는 대부분 지루하고 박제된 공연을 보는 듯한 느낌이들었던 게 사실이다. 생명력이 생명인 공연에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건예술가들의 필수조건인 ‘절실함’이 결여됐기 때문인 거다. 사실국립극단(국립극장 산하의 다른 단체에 대해선 잘 모르겠지만)의 배우들에겐나라를 대표하는 배우라는 프라이드보다는 ‘대표배우’로 대우받지 못한다는자괴감과 잘리지만 않으면 실력과는 상관없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안이함이더 컸기 때문이리라.그의 곁에는 언제나 청년들이 북적댄다 사실 이런 얘긴 나처럼 나라를 대표하는 배우가 되지 못하고 연기로 월급을 받지못하는 배우들이 술자리에서 ‘국가대표 선수들’을 흉볼 때나 하는 말이지 그‘안’에 있는 배우가 현재 ‘안’에 있는 상황에서 <한국연극> 같은 공적인곳에다 떠들어댈 땐 얘기가 달라진다. 게다가 개혁을 부르짖는 것이 당연해 보이고그러다 잘리면 다른 데로 가버리면 그만인 앞날 창창한 젊은 단원이 그랬다면 또그림이 좀 그럴듯해 보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난해 <한국연극> 2, 3월 합본호에‘국・공립단체, 비민주적 제도와 리더십이 문제다’라는 글을 써서 50년 동안아무도 건드리지 못한 채 깊게 곪아버린 ‘공무원극장’을 발칵 뒤집어놓은‘젊은’ 단원은 나이 50이 넘은 늙다리 단원, 배우 우상전이었다.

그는 그 글에서 우리나라 어디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국공립단체장들의 비민주적인인사와 보신행정, 복지부동의 병폐들이 예술하는 곳이라 해서 다르지 않다고일침을 놓았다. 그는 또 유명무실하기 짝이 없고 일제의 잔재 냄새가 나는‘단장’제를 폐지하고 공연의 질을 높일 수 있도록 외부에서 예술감독을 초빙하는제도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외치는 개혁의 손가락 끝은 총관리직,말하자면 정부쪽이라 할 수 있는 김명곤 국립극장장을 향해 있었다. (아무리 그전에 진보적인 인생을 살았다 하더라도 일단 정부 산하의 관리직 자리에 오르면모르쇠로 일관하며 권위적인 모습으로 탈바꿈하는 것이 인간의 생리인 걸까?대학로에서 가장 진보적인 연극을 한다는 평을 듣던 극단 중의 하나인‘아리랑’의 전 대표였던 김명곤씨가 지금 그 자리에서 개혁을 부르짖는‘아랫’사람들의 공격을 받고 있으니 말이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며칠 전 그가 외부단원 자격으로 출연한 한 연극을 보고 뒤풀이 자리에서 그와술을 마시다가 연극계가 현재의 침체기에서 벗어나려면 영화처럼 프로듀서시스템이 빨리 정착돼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는 그를 보면서 그를 진작 이 자리에‘모시지’ 못한 걸 안타까워하며 후다닥 인터뷰 약속을 잡았다. 실제 나이보다10살은 더 들어 보이는 외모 덕분(?)에 관절염약 광고에 진짜 노인네들 속에섞여서 트위스트 춤을 추기도 하지만 눈빛만큼은 어느 젊은 연극인 못지않게, 아니그들보다 한층 더 순수한 열정으로 빛나는 그를 대학로 한 카페에서 만났다.

대학로의 불문율 중 하나. 연극계 어르신들이 많이 모이는 카페엔 젊은 사람들이가질 않고 젊은 연극인들이 많이 모이는 카페엔 어르신들이 ‘애들 가는데 ’라고오시질 않는다. 그만큼 연극계에도 세대간의 대화가 단절된 지 오래다. 하지만그의 곁에는 언제나 젊은 친구들이 북적인다. 인터뷰 도중에도 조카뻘 되는 후배연극인들로부터 계속 전화가 왔다. 그들과 대화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친구와얘기하는 것 같았다. 젊은 친구가 많은 이유는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자기들이나 공무원이지…” 배신자라는 소리까지 들을 걸 예상했으면서 왜 그런 글을 썼느냐고 물었다. “벌받을까봐 그랬다. 국립극단은 연극을 하기엔 천국 같은 곳이다. 하루종일 쓸 수있는 쾌적한 연습실이 있고 모든 예술가들의 꿈인 월급을 받는다. 국립극장쪽은예산 타령만 하지만 정부쪽에 신망만 얻으면 돈을 타내는 건 식은 죽 먹기이므로제작비 걱정도 없다. 게다가 손님이 안 들어도 개인적으로 망할 사람 없으니처참하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국립극단 ‘밖’의 연극인들 처지를 생각하면천혜를 누리는 배우로서 양심이 견디질 못했다.” 그의 대답이었다.

국립극장의 각 단체 단원들은 월급을 받는 대신 해마다 자체 오디션을 통해다음해에도 남을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심판받게 돼 있었다. 한데 이오디션이라는 게 참으로 애매한 제도다. 원래 오디션의 의미는 사용자쪽이예술가의 기능을 구매하고자 할 때 얼굴만 봐선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실력을테스트해보는 제도다. 몇년을 함께 지내며 단원 개개인의 기량을 모를 리 없는단체장으로서는 자르는 기준이 ‘괘씸죄’가 될 수밖에 없게 돼서 해마다 내침을당하는 단원들은 공개적이거나 합리적인 이유를 듣지도 못하고 오해만 무성해지기일쑤였다. 때문에 실력을 키우는 것보다는 단체장 눈에 들어야 하는 단원들의 말못할 고충이 있었던 거다.

이런 병폐를 막기 위해 그는 지난해에 배우노조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그것은국립극단 50년 역사상 처음 일어난 혁명이었다. 그 이름하야 ‘국립극장예술단체노동조합’. 국립극단, 국립창극단, 국립무용단, 국립관현악단 단원 180명중 한두명을 뺀 전원이 노조 조합원이다. 그가 노조의 필요성을 느끼고‘밀어붙인’ 지 보름 만에 얻어낸 성과였다. 김명곤 극장장은 국가기관이라곤란하다며 난색을 표명했지만 그의 표현에 따르면 “자기들이나 공무원이지 우리단원들은 공무원 신분도 어차피 아니었으므로” 가능했던 일이다. 단원들이공무원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나도 이번에 처음 안 사실이다. 그래서 그런 치욕적인오디션을 매번 거쳐야 했던 거다. 국가대표 배우의 프라이드를 가지려야 가질 수없었던 거다.

연기술에 관한 책 쓰고 싶어 노조가 생긴 뒤 교조적이고 권위적이던 국립극장은 엄청난 민주화의 물결을 타고있다고 한다. 작은 안건 하나도 노조회의를 거쳐 탄생하게 됐다는 거다. 오디션제도는 당연히 없어졌고. 그렇담 철밥통을 꿰차겠다는 심보일까? 대안책으로마련된 상시평가제가 활발히 진행 중이란다. 무엇보다도 단원들의 사기와 자부심이충만해진 것이 제일 보람된 일인 것 같다고 말하는 그에게 초대 노조위원장을 했을때 힘들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물었다. 노동법을 몰라 늦공부를 하느라 엄청고생을 했다고 한다. “알아야 면장을 해먹지”라며 껄껄 웃는 그의 얼굴이 그렇게믿음직해 보일 수 없었다.

50대 인생을 가열차게 살고 있는 그는 국립극단 초대 노조위원장이란 타이틀 외에‘대학로 검증 배우’라는 별명도 갖고 있다. 서울에서 공연되는 연극의 객석엔거의 하나도 빼놓지 않고 그가 앉아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연기술에 관한 책을쓰고 싶어한다. 평생 그 많은 연극을 봐왔으니 따로 공부하지 않아도 훌륭한 책이나오리라 믿는다. 이렇게 열심히 사는 사람한테는 신이 보너스로 남들보다 몇년을더 살게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여전히‘청년’이었다. 그가 책을 내면 연극서적 출판계에도 혁명이 일어날지 모른다.

다들 그의 레이더에 걸리지 않게 조심하시길! 청년 우상전 파이팅!!글 오지혜(영화배우)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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