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명시 102 - 한성기의 <역(驛)>

김영환 2003. 1. 23. 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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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불 시그널이 꿈처럼 어리는거기 조그마한 역이 있다.

빈 대합실(待合室)에는의지할 의자(椅子) 하나 없고이따금급행열차(急行列車)가 어지럽게 경적(警笛)을 울리며지나간다.

눈이 오고 ……비가 오고 ……아득한 선로(線路) 위에없는 듯 있는 듯거기 조그마한 역(驛)처럼 내가 있다.

<역(驛)> 한성기 간이역(簡易驛)이 스치는 풍경이글거리는 해가 머리 위에서 열차의 철판을 뜨겁게 달구고 있지만 차창을 스치는 싱그러운 대지가 연신 바람을 일으켜 객차 칸 열기를 싹 가셔 준다. 목적지도 없이 끝닿는 그곳까지 마냥 달릴 셈인지 조그만 간이역들이 그냥 맥없이 물러난다. 아예 귀착지가 없는 그들인지 벌써 곯아떨어져 입이 벌고 드렁드렁 코를 곤다. 안았던 보퉁이가 그새 바닥 아래로 곤두박질쳐 매듭을 풀어헤치고 속이 비죽 비죽 드러난다.

연신 아이가 보채자 달래느라 아낙이 앞가슴을 헤치고 젖을 물린다. 속살이 하얗게 드러나서 계면쩍어 씩 웃는다. 그 젖무덤에 파란 핏줄이 강줄기처럼 서로 뒤엉켜 서럽게 흘러내린다. 왠지 자꾸만 눈길이 그쪽으로만 쏠려 여간 거북스럽지 않다. 맺힌 땀방울을 아낙은 콧등과 이마를 손등으로 씩 문지른다. 그런 그 모습이 예사로 천연덕스럽다. 간이역이 얼른얼른 지나치는 차창 밖 풍경으로 간간이 떨어지지 않는 눈길을 돌린다. 그래도 녹음이 스칠 때마다 사라지지 않아 차창에 어린 그림자가 애연하다.

유야무야(有耶無耶)이고 말 것인가!유야무야로 끝내 사라지고 말 것인가? 부드럽고 여린 것들이 가지로만 잎새로만 버티기에는 하늘이 너무 애달다. 숨 가쁘게 달리는 그침 없는 무한 속도의 경쟁. 그렇게 하루가 시들고 다음 날 새벽이 오면 잠시 쉬어갈 간이역 하나 없이 보퉁이를 안고 메고 허겁지겁 집을 나서지만 이내 무섭게 다가서는 입구.고독한 비명(碑銘)시인의 역(驛). 눈 오고 비 오는 숱한 세월에 지친 몸 이끌고 잠시나마 의지하고파도 쉬어갈 곳도 없는 간이역. 옛 푸른 불 시그널이 이제는 꿈처럼 어리는 거기 아득한 선로 위에 아직 부드럽고 여린 그림자를 안고 없는 듯 있는 듯 거기 조그만 역처럼 내가 있다. 없는 듯 있는 듯, 유야무야인 것이 내세울 것도 없이 존재하는 것만으로 쳐다만 보고 침묵하고 마는 고독, 언젠가는 그들이 떠나고 말아 지워지는 비명(碑銘)이다.

관조의 세계이 시가 1952년 5월 <문예> 지에 발표된 것을 보면, 아직은 한창을 비껴나는 나이도 아닌데도 시가 단아하기 이를 데 없이 관조의 세계이다. 아래 구절이 그렇다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없는 듯 있는 듯`이 - 겉으로는 눈여겨 보아주지 않는 고독이나, 안으로는 초탈(超脫)이다.

아득한 선로(線路) 위에없는 듯 있는 듯거기 조그마한 역(驛)처럼 내가 있다.

그리하여 <역(驛)>은 존재론적 담론이 아니고 대상의 관조이다. - 무한한 평행선을 달리는 시공(時空), 그 위 조그마한 한 점인 것이 고독한 풍경, 시인의 간이역(簡易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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